08. 창의·확산

은유적 사고 (metaphor)

한 대상을 전혀 다른 대상에 빗대되, 둘이 닮았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그것이라고 겹쳐 부름으로써 새 의미를 길어 올리는 사고법. 마음은 보이지 않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늘 더 가깝고 만질 수 있는 것의 모습을 빌려 붙잡는데, 이 빌려 입히기가 단순한 말의 장식이 아니라 생각의 뼈대 자체라는 점이 핵심이다.

너, 누군가와 한참 말다툼을 하고 나온 적 있지. 그 장면을 어떻게 입에 올리는지 잠깐 들여다봐라. 너는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다. 걔 주장이 영 약해서 내가 단번에 무너뜨렸어. 내 입장을 끝까지 지켰지. 그 말은 정말 뼈아픈 데를 찔렀어. 자, 이상하지 않나. 너희는 손도 안 댔고 칼도 안 들었고 그냥 카페에 마주 앉아 입으로 떠들었을 뿐인데, 너는 지금 그 일을 통째로 전쟁의 말로 옮겨 적고 있다. 공격하고, 방어하고, 무너뜨리고, 찌르고.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너는 말싸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창과 방패가 부딪치는 눈에 보이는 싸움터 위에 살짝 겹쳐 얹어 버린 거다. 오늘 이야기는, 인간이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평생 무심코 해 온 이 겹쳐 부르기에 관한 거다. 그리고 가장 흔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그 버릇이, 실은 생각의 가장 깊은 바닥이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관한 거다.

이 겹쳐 부르기에 처음 이름을 붙인 사람은 멀리, 대략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붙인 말이 메타포라, 글자 그대로 풀면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 나른다는 뜻이다. 한 대상에게 붙어 있던 이름을 떼어, 본디 제 것이 아닌 다른 대상 위에 옮겨 얹는 일. 그는 시 짓기를 논하는 글에서 이걸 따로 떼어 살피며 묘한 말을 하나 남겼다. 여러 말솜씨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은유를 다루는 솜씨이며, 이것만은 남에게서 배워 얻을 수가 없고 오직 타고나야 하는 천재의 표식이라고. 닮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닮음을 한눈에 알아보는 눈, 그건 가르쳐 줄 수 없는 재능이라는 거였다. 이 한마디가 그 뒤로 거의 이천 년을 지배한다. 은유는 보통 사람의 평범한 말과는 다른, 시인과 웅변가만이 부리는 특별한 장식이라는 생각 말이다. 멋을 내려고 덧바르는 색칠, 알맹이가 아니라 겉치레. 오래도록 은유의 자리는 거기였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 오늘 이야기의 긴장이 있다. 정말 은유는 타고난 소수만 부리는 진귀한 재주이고, 나머지 우리는 맨숭맨숭한 맨말로만 사는가. 이 오래된 믿음에 정면으로 금을 낸 일이 20세기에 일어난다. 1980년,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와 철학자 마크 존슨이 함께 얇은 책 한 권을 내놓는다. 우리가 그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은유들, 이라는 제목이었다. 두 사람이 한 일은 거창한 이론을 세운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을 받아 적어 한자리에 모아 놓고 들여다본 것뿐이다. 그랬더니 소름 끼치는 무늬가 드러났다. 맨 처음 너의 말싸움이 그랬듯, 사람들은 다툼을 통째로 전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하는 말을 모아 보니,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간을 돈처럼 다루고 있었다. 시간을 쓴다, 아낀다, 낭비한다, 벌었다, 투자한다. 시간은 동전이 아닌데도 너는 그것을 지갑 속 돈인 양 만지고 있었던 거다. 사랑을 말할 땐 한결같이 여행으로 옮겨 말했다. 우리 관계가 갈림길에 섰다, 여기까지 멀리 왔다, 이 길은 막다른 골목이다. 두 사람은 이런 무늬를 수백 개씩 끌어모아 못을 박았다. 은유는 시인의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상적인 것을 머릿속에서 붙잡고 사고하는 방식 그 자체다. 잡히지 않는 다툼을, 시간을, 사랑을, 인간은 늘 더 구체적이고 몸에 가까운 것, 싸움이나 돈이나 길의 모습을 빌려서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오랜 말이 절반만 옳았다는 게 드러난다. 닮지 않은 둘에서 닮음을 보는 일이 위대하다는 건 맞다. 그러나 그것이 타고난 소수만의 재주라는 건 틀렸다. 정반대다. 그건 모든 사람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자기가 그러는 줄도 모른 채 하고 있는 일이었다. 시인이 특별한 건 없던 은유를 만들어 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잠긴 채 헤엄치는 그 물을 처음으로 또렷이 길어 올려 보여 주기 때문이다. 가장 진귀하다던 재능이 알고 보니 가장 흔한 공기였다. 레이코프와 존슨이 이뤄 낸 건 바로 이 뒤집기다. 은유를 멋 내는 수사의 골방에서 끌어내어, 생각이 돌아가는 엔진실 한복판에 다시 앉힌 일. 이걸 그들은 개념적 은유라 불렀다. 입에서 나오는 말의 은유 밑에, 머릿속에서 한 영역을 다른 영역으로 통째로 포개 놓은 생각의 은유가 먼저 있다는 뜻이다. 다툼이 전쟁이라는 생각이 먼저 머리에 깔려 있기에, 입에서 공격하고 방어한다는 말이 줄줄이 흘러나오는 거다.

이 깨달음이 컴퓨터 앞에 서자 묘한 곤경이 펼쳐졌다. 기계에게 사람 말을 읽히려던 이들은 곧 벽에 부딪쳤다. 은유란 표면만 보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돈이다, 라는 문장을 글자 그대로 따지는 기계에게 그건 그냥 틀린 말, 동전이 아닌 것을 동전이라 우기는 오류일 뿐이다. 기계가 이 문장을 헛소리로 버리지 않고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단어를 하나씩 뜻풀이하는 걸로는 영영 안 된다는 게 분명해졌다. 시간이라는 영역 전체와 돈이라는 영역 전체를 머릿속에 펼쳐 놓고, 둘 사이에 무엇이 무엇에 대응하는지 그물 전체를 통째로 맞대어 옮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여기서 사람들이 다시 끼워야 했던 생각의 윗단추가 있다. 의미란 단어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몸으로 겪은 구체적인 경험의 영역들끼리 서로 비추고 빌려 쓰는 데서 솟아난다는 것이다. 시간을 돈으로 느끼는 그 빌림은 사전에 적힌 정보가 아니라, 무언가를 아껴 쓰고 흘려보내며 살아 본 몸의 경험에서 온다. 기계에게 은유를 가르치려다, 인간이 의미를 어떻게 짓는가라는 가장 밑바닥 물음 앞에 사람들은 다시 서야 했다.

그러니 너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붙들고 끙끙대는 순간을 만나거든, 그것을 곧장 노려보지 말고 가만히 물어라. 이걸 나는 지금 무엇의 모습으로 떠올리고 있나. 그러고는 그 빌려 온 옷을 일부러 한번 벗기고 전혀 다른 옷으로 갈아입혀 보아라. 다툼을 전쟁이 아니라 함께 추는 춤으로 옮겨 부르는 순간, 같은 일이 통째로 다른 얼굴이 된다. 잡히지 않는 것은 늘 무언가에 빗대어서만 잡히고, 어떤 옷을 입히느냐가 곧 네가 그것을 어떻게 살게 되는지를 정한다. 그게 한낱 말의 장식인 줄 알았던 겹쳐 부르기가, 실은 생각의 뼈대였다는 이야기의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