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하기 (defamiliarization)
너무 익숙해서 더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대상을, 마치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일부러 어색하고 생경하게 만들어 그동안 무뎌진 지각을 되살리는 기법. 본디 예술이 사물을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 쓰는 방법으로,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이론으로 또렷이 정리되었다.
너, 집에 들어가면서 신발을 어떻게 벗었는지 떠올릴 수 있나. 아마 못 떠올릴 거다. 분명 매일 하는 일인데, 너무 익숙해서 손과 발이 알아서 처리해 버리고 머리는 그새 딴생각을 한다. 출근길에 늘 지나는 골목, 늘 마시는 첫 모금의 물, 늘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 — 너무 자주 봐서 이제는 사실상 안 보는 것들이다. 우리 머리는 게을러서, 한 번 익숙해진 것은 '안다'는 도장을 쾅 찍어 창고에 처박고 두 번 다시 꺼내 보지 않는다. 그렇게 매일 쓰던 것들이 슬그머니 투명해진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투명해진 것들을 다시 불투명하게 — 다시 눈에 걸리게 — 만드는 짓궂은 기술에 관한 거다. 그리고 이 기술을 처음 또렷한 말로 붙잡은 사람은, 군용 장갑차를 몰던 스물세 살 청년이었다.
때는 대략 1916년 무렵 러시아. 빅토르 시클롭스키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장갑차 부대에서 운전 교관 노릇을 하면서, 동시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또래 학자들과 모임 하나를 꾸렸다. 시(詩)의 언어를 연구하자는 모임이었는데, 흔히 '오포야즈'라 불린다. 이들이 나중에 '러시아 형식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한 무리다. 그리고 1917년, 혁명으로 온 나라가 들끓던 바로 그해에 시클롭스키는 짧은 글 하나를 내놓는다. 우리말로 흔히 '기법으로서의 예술'이라 옮기는 글이다. 거기서 그는 러시아어로 '오스트라네니예'라는 단어를 끌어다 못을 박는데, 굳이 옮기면 '낯설게 만들기' 쯤 된다. 원래 흔히 쓰던 말이 아니라, 그가 자기 이론을 담으려고 살짝 비틀어 벼린 말이다.
그가 던진 핵심 문장이 있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을 우리가 '아는 대로'가 아니라 '지각하는 대로'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그가 든 비유로 보자. 우리는 '돌'이라는 말을 수천 번 들어서, 이제 돌을 봐도 진짜 돌을 보는 게 아니라 머릿속 '돌'이라는 딱지를 슥 확인하고 지나친다. 돌의 그 차갑고 거칠고 묵직한 돌다움이 통째로 증발해 버린 거다. 그래서 예술이 하는 일은, 그가 말하길, 그 돌을 다시 '돌처럼' 만드는 것이다. 일부러 형태를 어렵게 하고, 보는 데 시간이 더 걸리게 하고, 손이 미끄러지게 한다. 왜? 지각하는 과정 그 자체를 길게 늘여, 네가 그것을 진짜로 '겪게' 만들기 위해서다. 습관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고 그는 봤다. 옷도, 가구도, 아내의 얼굴도, 전쟁의 공포마저도. 그 집어삼킴에 맞서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아 주는 것 — 그게 예술의 본업이라는 거다.
자, 이게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님을 그는 한 작품으로 끝까지 보여 준다. 톨스토이가 쓴 '홀스토메르'라는 중편이 있다. 우리말로는 흔히 '어느 말 이야기'쯤으로 통한다. 핵심은 이거다. 이 이야기의 화자가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 늙은 말이다. 세상을 사람 눈이 아니라 말의 눈으로 본다. 그 말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내 말(馬)'이라는 사람들의 말버릇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두고 자꾸 '내 말'이라 부른다. 말은 어리둥절해한다. '나의'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사람들은 '내 땅', '내 공기', '내 물'이라는 말도 쓰던데, 정작 땅을 한 번도 갈아 본 적 없고 그 공기를 마셔 본 적도 없는 자들이 그렇게 부른다. 말이 보기엔 '나의'라는 그 한마디가 세상에서 가장 괴상하고 텅 빈 소리다. 봐라, 너도 '내 것'이라는 말은 수만 번 써서 공기처럼 투명해진 단어다. 그런데 말의 눈을 한 번 빌리는 순간, 소유라는 게 얼마나 기이하고 근거 없는 약속인지가 와락 낯설게 드러난다. 익숙한 단어 하나를 처음 보는 물건처럼 뒤집어 보여 준 거다. 시클롭스키가 이 작품을 콕 집은 이유가 바로 이거다 — 시점을 사람에서 말로 한 칸 옮겼을 뿐인데, 우리가 평생 의심 없이 딛고 선 '소유'라는 바닥이 통째로 출렁인다.
이 도구를 전혀 다른 무대에서 가장 멀리 끌고 간 사람은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다. 그는 시클롭스키의 그 '낯설게 하기'를 가져와 연극의 심장에 박아 넣고, '소외 효과'(페어프렘둥스에펙트)라는 자기 이름을 붙였다. 보통 연극은 관객을 무대에 푹 빠뜨려, 주인공과 한 몸이 되어 울고 웃게 만들려 한다. 브레히트는 정반대로 갔다. 일부러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걸게 하고, 무대 장치를 훤히 드러내고, 노래로 흐름을 뚝 끊었다. 관객이 "이건 연극이구나" 하고 퍼뜩 깨어나 한 발 물러서게 만든 거다. 왜 그랬을까. 푹 빠진 관객은 무대 위 세상을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한 발 물러선 관객은 '저건 왜 저렇지, 바뀔 수도 있지 않나' 하고 따져 묻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시클롭스키에게 낯설게 하기가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일이었다면, 브레히트에게 그것은 당연하게 굳은 사회 질서를 다시 의심하게 만드는 무기였다. 한 사람이 문학 이론으로 깎아 낸 칼을, 다른 사람이 세상을 흔드는 연장으로 다시 벼린 셈이다.
그러니 너가 어떤 대상을 두고 '이건 너무 뻔해, 다 안다'는 느낌이 들거든 — 바로 그 느낌이야말로 위험 신호다. 안다는 게 아니라, 익숙해서 더는 안 보고 있는 것일 때가 많다. 그럴 땐 일부러 시점을 한 칸 옮겨 봐라. 외계인이 처음 본다면, 백 년 전 사람이 본다면, 저 말(馬)이 본다면 이게 어떻게 보일까. 늘 쓰던 그 단어, 늘 하던 그 절차, 너무 당연해 아무도 안 건드리는 그 전제를 난생처음 보는 물건처럼 손에 들고 돌려 봐라. 투명해서 안 보이던 것에 다시 표면이 생기고, 그제야 거기 무엇이 가려져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그게 장갑차를 몰던 한 청년이 남긴, 익숙한 것을 처음 보듯 만들어 가린 면을 드러내는 생각의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