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창의·확산

개념적 혼성 (conceptual blending)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신적 영역(정신공간)에서 일부 요소만 골라 한데 섞어, 어느 한쪽에도 원래는 없던 제3의 의미를 새로 빚어내는 무의식적 사고 작용. 은유, 농담, 새 발상, 일상 언어의 대부분이 이 섞음질의 산물이며, 인간 특유의 상상하는 마음의 밑바탕으로 여겨진다.

너한테 오래된 수수께끼 하나를 줄 테니 끝까지 따라와 봐라. 어떤 수도승이 있다. 그는 어느 날 동틀 녘에 산 아래에서 출발해 좁은 산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 해 질 무렵 꼭대기에 닿는다. 거기서 며칠을 머물며 명상을 하다가, 또 어느 날 동틀 녘에 그 똑같은 길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해 해 질 무렵 산 아래에 닿는다.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걸음의 빠르기는 들쭉날쭉, 중간에 쉬기도 하고 멈춰 서기도 한다. 자, 문제는 이거다. 그 산길 위에, 올라간 날과 내려온 날 똑같은 시각에 그가 정확히 같은 지점을 밟는 그런 자리가 반드시 하나 있다는 걸, 증명해 봐라. 머리로 식을 세우려 들면 금세 막힌다. 속도가 제멋대로니 계산이 안 선다. 그런데 방법이 하나 있다. 올라가는 수도승과 내려오는 수도승을, 같은 날 동시에 그 길에 세워 보는 거다.

자, 머릿속에 두 사람을 동시에 풀어 놓아라. 한 명은 동틀 녘 산 아래에서 위로, 다른 한 명은 같은 동틀 녘 꼭대기에서 아래로, 같은 좁은 길을 마주 보고 걷는다. 그러면 빠르기가 어떻든 둘은 길 어딘가에서 반드시 스쳐 지나간다. 외길이니까 피할 수가 없다. 바로 그 마주치는 지점, 그 시각 — 그게 네가 찾던 답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그 한 점이, 사실은 한 사람이 이틀에 걸쳐 같은 시각에 같은 자리에 있게 되는 바로 그 지점이거든. 여기서 잠깐 멈춰서 네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봐라. 너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장면 — 한 사람이 둘이 되어 동시에 오르내리는 장면 — 을 머릿속에 만들었다. 현실엔 없는 그림이다. 그런데 그 가짜 그림 안에서 '둘이 외길에서 반드시 만난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 하나가 툭 튀어나왔고, 그걸 도로 현실의 한 사람한테 돌려주니 증명이 끝나 버렸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이 솜씨, 두 장면을 한 솥에 부어 섞어서 어느 쪽에도 없던 답을 길어 올리는 그 머릿속 작용에 관한 거다.

이 수수께끼는 원래 헝가리 출신의 작가 아서 쾨슬러가 1964년에 낸 '창조 행위'라는 책에 실렸던 거다. 쾨슬러는 농담이 터지는 순간, 과학자가 무릎을 치는 순간, 예술이 가슴을 치는 순간이 죄다 같은 뼈대를 가졌다고 봤다. 서로 상관없던 두 개의 사고 틀이 느닷없이 충돌해 한자리에서 만나는 것 — 그는 이걸 두 개의 판이 부딪친다는 뜻으로 '쌍연상(bisociation)'이라 불렀다. 좋은 직관이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진 못했다. 두 틀이 만난다는 건 알겠는데, 만나서 머릿속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 살림의 구조까지는 파고들지 못한 거다.

그 안쪽 살림을 해부한 사람이 따로 있다. 1990년대 초,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던 언어학자 질 포코니에와, 메릴랜드에서 영문학을 하던 마크 터너가 손을 잡았다. 포코니에는 그 전부터 한 가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할 때, 머릿속에서는 작은 임시 작업판 같은 것들이 그때그때 만들어진다는 거다. '내가 지금 산을 오르는 장면'이 한 판, '내려오는 장면'이 또 한 판. 그는 이 작은 판들을 정신공간이라 불렀다. 두 사람이 함께 밀어붙인 결론은 이랬다. 사람의 마음은 이 정신공간 두 개를 그냥 나란히 놓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양쪽에서 필요한 조각만 골라 뽑아 제3의 새 판에 부어 섞는다. 그 섞인 판 안에서는, 원래 두 판 어디에도 없던 장면과 의미가 새로 자라난다. 그들은 이 섞음질에 개념적 혼성, 개념적 통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산을 오르는 수도승과 내려오는 수도승, 따로 있던 이 두 판을 한 날 한 길에 부어 섞으니 '마주침'이라는 없던 사건이 솟아오른 것, 그게 바로 혼성이 일하는 현장이다.

여기서 이 발상이 무서워지는 대목이 있다. 두 사람은 이게 어쩌다 천재가 부리는 특별한 재주가 아니라고 못 박았다. 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섞고 있다. '컴퓨터 바이러스'라는 흔한 말을 떠올려 봐라. 한쪽엔 병들어 옮는 생물의 판이 있고, 다른 쪽엔 프로그램과 기계의 판이 있다. 둘은 원래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둘을 섞어, 스스로 퍼지고 감염시키고 잠복하는 못된 코드라는 제3의 의미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빚어내 쓴다. '시간을 낭비한다', '논쟁에서 졌다'는 말조차 죄다 두 영역을 포갠 혼성이다. 2002년에 두 사람이 함께 낸 책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에서 그들은 이 작용이 인간의 상상하는 마음 그 자체의 뿌리라고까지 밀어붙였다. 멀리 떨어진 둘을 잇는 것도, 둘을 그냥 비유로 빗대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양쪽에서 조각을 떼어다 새 살림을 차리고, 그 안에서 어느 쪽에도 없던 무언가를 키워 내는 데 있다.

이 오래된 머릿속 솜씨가 끝내 가장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자리가 바로 네 눈앞의 컴퓨터 화면이다. 한번 생각해 봐라. 화면 속 '바탕화면'에는 책상도 종이도 없는데 우리는 거기에 서류와 폴더를 올려놓는다. 다 쓴 파일은 '휴지통'에 버리고, 그 휴지통을 비우면 사라진다. 이게 다 혼성이다. 한쪽엔 종이와 책상과 쓰레기통이 있는 사무실이라는 판이 있고, 다른 쪽엔 데이터를 지우고 옮기는 기계의 동작이라는 판이 있다. 초창기 설계자들은 이 둘을 화면 위에서 통째로 포개 섞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어려운 기계 명령어를 외우지 않고도, 책상에서 서류 만지던 몸의 습관 그대로 컴퓨터를 부릴 수 있으니까. 여기서 네가 정말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이 화면을 빚어내려면 설계자들은 생각의 가장 윗단추부터 갈아 끼워야 했다. 그 전까지 컴퓨터를 쓴다는 건 '기계에게 정확한 명령을 입력하는 일'이었다. 그 윗단추를 빼고, 컴퓨터 쓰기를 '현실의 책상과 기계의 동작이 한데 섞인 가짜 세계 속에서, 그 세계의 물건을 직접 만지는 일'로 다시 끼운 것이다. 그제야 휴지통에 파일을 끌어다 넣는다는 발상이 가능해졌다. 우리가 매일 화면 속에서 너무 당연하게 누리는 그 편함은, 사실 두 세계를 녹여 붙인 거대한 혼성 한 장 위에서 사는 일이다.

그러니 너가 어느 쪽으로도 도무지 안 풀리는 문제 앞에 섰거든, 한쪽 판만 붙들고 식을 세우려 끙끙대지 마라. 전혀 다른 장면 하나를 그 옆에 끌어다, 둘을 한 솥에 부어 억지로 섞어 봐라. 이 일을 전쟁처럼, 정원 가꾸기처럼, 두 사람의 마주침처럼 겹쳐 놓는 거다. 답은 종종 둘 중 어느 판에도 들어 있지 않다. 두 판을 섞었을 때 그 사이에서 새로 피어나는 제3의 자리에 가 있다. 그게 한 수도승의 산길이 우리에게 일러 주는, 섞어야 비로소 보인다는 생각의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