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철학적 방법

초월론적 논증 (transcendental argument)

어떤 경험이나 인식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그것이 가능하려면 무엇이 이미 참이어야만 하는가를 거슬러 캐묻는 논증법. 결론을 직접 증명하는 대신, 의심할 수 없는 출발점이 성립하기 위한 '숨은 전제조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너, 누가 옆에서 끈질기게 시비를 걸어온다고 해 보자.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그는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되묻는다. 바깥세상이 진짜로 있다고? 증명해 봐라. 어쩌면 너는 통 속의 뇌일지도, 꿈을 꾸는 중일지도 모르잖나. 이런 상대 앞에서 보통 사람은 두 가지로 반응한다. 증거를 더 쌓아 들이밀거나, 답답해하다 입을 닫거나. 그런데 둘 다 진다. 증거를 내밀면 그 증거를 또 의심하면 그만이고, 입을 닫으면 그가 이긴 모양새가 되니까. 오늘 이야기는, 이 끝없는 의심꾼을 정면이 아니라 옆구리로 쓰러뜨리는 아주 묘한 수법에 관한 거다. 그를 이기는 길은 더 센 증거가 아니라, 그가 지금 의심하는 바로 그 행위가 이미 무엇을 몰래 깔고 있는지를 들춰내는 데 있다.

이 수법에 정확한 이름을 처음 박은 사람은 18세기 후반 쾨니히스베르크의 칸트다. 평생 그 도시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시계처럼 산책했다는 그 사람이다. 칸트는 흄이라는 회의주의자 때문에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흄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믿는 것들 — 원인과 결과가 정말 묶여 있다는 믿음 같은 것 — 이 실은 습관일 뿐 증명된 적 없다고 못 박았다. 정면으로 반박하려 들면 흄을 못 이긴다. 그래서 칸트는 질문을 통째로 뒤집었다. '이것이 참인가'를 묻지 않고,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성립하려면, 그 밑에 무엇이 이미 깔려 있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그는 이 거슬러 올라가는 물음에 '초월론적'이라는 말을 붙였다. 여기서 초월론적이란 하늘 위 신비를 뜻하는 게 아니라, 경험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드는 그 바닥의 조건을 캐묻는다는 뜻이다.

말로만 하면 막연하니, 칸트가 끝까지 풀어 보인 한 수를 따라가 보자. 1781년에 낸 그 두꺼운 책을 1787년에 고쳐 내면서, 칸트는 '관념론 반박'이라는 짧은 대목을 새로 끼워 넣었다. 표적은 데카르트였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한 건 '내 안의 의식'이고 바깥세상은 그다음에야 의심스럽게 따라온다고 했다. 안에서 밖으로 가는 순서다. 칸트는 이 순서를 거꾸로 엎었다. 그의 논증은 이렇게 흐른다. 너는 적어도 네 마음속이 시간을 따라 변해 간다는 것만은 의심하지 못한다. 아까는 이 생각, 지금은 저 생각, 그 흐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무언가가 '변한다'고 말하려면, 그 변화를 재 줄 '변하지 않고 머무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머무는 기준점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내 마음 안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은 내 바깥에, 지속하는 사물의 세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결론이 절묘하다. 바깥세상을 의심하려면 너는 먼저 네 마음의 흐름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 흐름을 인정하는 순간 너는 이미 바깥세상을 인정해 버린 셈이다. 의심하는 행위 자체가 의심의 대상을 끌어안고 있다. 의심꾼은 자기 발밑이 꺼지는 걸 본다.

이 도구는 한동안 칸트 특유의 무거운 형이상학에 파묻혀 잊혔다가, 20세기 중반 영국의 스트로슨이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되살렸다. 그는 칸트의 신비한 장치들을 덜어내고, '우리가 경험에 대해 말이라도 하려면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나'라는 한결 담백한 형태로 다듬었다. 그 덕에 초월론적 논증은 다시 철학의 한복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가장 매서운 반격이 날아든다. 1968년, 배리 스트라우드라는 철학자가 짧은 논문 한 편으로 이 논증의 급소를 찔렀다. 그의 지적은 이랬다. 좋다, 네 마음이 흐르려면 '바깥세상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까진 인정하마. 하지만 그건 우리가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 바깥세상이 실제로 있다는 건 아니지 않나. 세상이 정말 그러해야 한다와 우리가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다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골이 있다는 거다. 이 한 방으로 초월론적 논증을 향한 열기는 식었고, 지금도 철학자들은 이 골을 메우려 씨름한다. 칸트가 의심꾼을 옆구리에서 쓰러뜨렸다면, 스트라우드는 그 칼이 닿는 깊이의 한계를 그어 버린 셈이다.

이 모든 다툼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이뤄낸 것은 작지 않다. 그는 '마음이 어떻게 세상에 들어맞는가'라는 오래된 물음을 '세상이 어떻게 마음의 조건에 들어맞을 수밖에 없는가'로 뒤집었고, 스스로 이를 천문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빗댔다. 묻는 방향 하나를 거꾸로 돌려 철학의 지형 전체를 다시 그린 것이다.

그러니 너가 무엇으로도 설득되지 않는 의심꾼을 만나거나, 도무지 증명할 길 없어 보이는 명제 앞에 서거든, 더 센 증거를 찾아 헤매기 전에 방향을 한 번 틀어 봐라. 정면으로 '이게 참이다'를 입증하려 들지 말고, 거슬러 물어라. 지금 우리가 멀쩡히 하고 있는 이 일 — 이 대화, 이 의심, 이 경험 — 이 애초에 가능하려면, 무엇이 이미 참이어야만 하는가. 부정할 수 없는 바닥을 딛고 그 바닥이 떠받치고 있는 숨은 전제를 끌어올리는 것, 그게 칸트가 남긴 이 거꾸로 된 사다리의 쓰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