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철학적 방법

방법적 회의 (Cartesian doubt)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있는 믿음은 일단 전부 거짓으로 치워 버리고, 그렇게 했는데도 도저히 흔들리지 않고 남는 단 하나의 확실성을 찾아, 그 위에서 앎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는 사고법. 의심을 지식을 허무는 무기가 아니라 더 단단한 토대를 고르는 체로 쓴다는 점이 핵심이다.

너, 어느 밤 잠이 안 와 천장을 보며 이런 생각에 빠진 적 있을 거다. 지금 이게 진짜 내 방이 맞나. 혹시 꿈이라면? 꿈속에서도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다고 멀쩡히 믿지 않았던가. 그럼 내가 아는 것 중에 정말로 확실한 건 뭐가 있지. 학교에서 배운 것, 부모가 일러 준 것, 눈으로 본 것 — 가만 보니 죄다 누가 떠먹여 준 것을 한 번도 안 씹고 삼킨 셈이다. 만약 그 떠먹여 준 것 전부가 어딘가 한 군데씩 어긋나 있다면? 너는 지금 평생 가짜 위에 집을 짓고 살아온 게 된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오싹한 의심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 무너지지 않는 바닥 한 장을 끝내 찾아낸 한 사람에 관한 거다.

의심 자체는 새것이 아니었다. 고대 회의주의자들은 천 년도 더 전부터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며 모든 앎을 허무는 데 의심을 휘둘렀다. 그건 부수는 망치였다. 그런데 대략 17세기, 프랑스 사람 데카르트는 같은 망치를 정반대로 쥐었다. 부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수고도 남는 것을 골라내 그 위에 다시 짓기 위해서. 전해지기로 그의 출발점은 책상이 아니라 군대였다. 1619년 겨울, 바이에른 군대를 따라 독일 울름 근처에 머물던 젊은 데카르트는 추위를 피해 난로로 덥힌 작은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생각만 했고, 그 무렵 꾼 꿈들을 평생 잊지 못해 훗날 글로 남겼다. 거기서 싹튼 결심이 하나였다. 내 머릿속 믿음을 한 채의 낡은 집으로 보고, 통째로 헐어 토대부터 다시 놓겠다는 것.

방법은 가혹했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구석이 있으면 일단 거짓으로 치자. 감각? 멀쩡히 곧은 막대도 물에 담그면 굽어 보이니, 못 믿는다. 치워라. 수학? 둘 더하기 셋은 다섯이지만, 혹시 어떤 교활한 악령이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 내가 계산할 때마다 매번 속이고 있다면? 그 가능성을 못 지우니, 일단 그것마저 치워라. 그는 이 '나를 통째로 속이는 악령'이라는 극단의 가정을 일부러 세워 의심을 갈 수 있는 끝까지 끌고 갔다. 거의 모든 게 쓸려 나갔다. 그런데 바로 그 잿더미 한복판에서, 도무지 치울 수 없는 단 하나가 버티고 섰다. 악령이 나를 아무리 속인다 해도, 속고 있으려면 '속는 내가' 있어야 한다. 의심하는 동안 의심하는 나는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적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1637년 프랑스어로 펴낸 책에 처음 나온 이 한 줄이,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의심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그 지점이었다.

여기서 짚을 게 있다. 데카르트가 한 건 회의주의가 아니다. 회의주의자는 '아무것도 확실치 않다'에서 멈춰 버린다. 데카르트는 그 의심을 끝까지 밀어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첫 벽돌 하나를 캐냈고, 그 위에서부터 세상과 신과 물질을 한 칸씩 다시 쌓아 올리려 했다. 의심을 종착지가 아니라 청소 도구로 쓴 거다. 이 사고가 가장 매섭게 작동한 건 그 자신의 손에서였다. 그는 이 방법으로 근대 철학 전체의 숙제를 새로 깔았다 — '무엇을 안다고 말하려면 그 바닥에 무엇이 깔려야 하는가.' 같은 정신, 곧 모든 걸 의심스러운 잡동사니로 치우고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것에서 다시 조립한다는 태도가 그가 좌표와 방정식으로 도형을 푸는 새 수학을 여는 데에도 그대로 흘렀다.

물론 그가 찾은 그 바닥돌마저 끝내 흔들렸다. 대략 18세기 후반, 독일의 리히텐베르크는 사사로운 공책에 짓궂은 한 줄을 남겼다.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이미 슬쩍 '나'를 깔고 들어간다고. 천둥이 칠 때 우리가 무심코 '그것이 천둥 친다'고 말하듯, 정직하게는 '생각이 일어난다'까지만 말할 수 있을 뿐, '내가'라는 주인은 거기 없는데 공짜로 끼워 넣었다는 거다. 데카르트가 의심을 못 견디고 남긴 단 하나의 확실성, 바로 그 이음매에 후대가 다시 의심의 끌을 댄 셈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의 교훈은 데카르트가 정답을 박았다는 게 아니다. 정답으로 의심받던 그 돌조차 다시 의심받았다는 것 — 그게 오히려 이 방법이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 오래된 의심술이 뜻밖에 컴퓨터 시대에 되살아난 자리가 있다. 옛날 기업 보안은 '일단 우리 울타리 안에 들어온 것은 믿는다'는 식으로 짜여 있었다. 한 군데만 뚫리면 안쪽 전부가 털렸다. 그래서 요즘은 정반대 원칙으로 갈아탔다 — 아무것도 기본값으로 믿지 않는다, 모든 접속과 모든 단계를 매번 새로 검증하고, 의심을 통과한 최소한의 것 위에서만 신뢰를 다시 쌓는다. 흔히 '제로 트러스트'라 부르는 이 발상의 골격이, 의심할 수 있는 건 다 치우고 흔들리지 않는 바닥에서만 다시 짓는 데카르트의 동작과 소름 돋게 닮았다. 여기서 정작 바뀌어야 했던 건 기술이 아니라 생각의 윗단추였다. '안에 있으면 믿는다'는 오래된 신뢰의 전제를 통째로 버리고, 신뢰란 물려받는 게 아니라 매번 검증으로 다시 벌어야 하는 것이라는 데로 틀 자체를 옮긴 뒤에야, 그 도구가 비로소 작동했다.

그러니 너가 어느 날, 지금껏 당연하게 깔고 일해 온 전제들이 통째로 썩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히거든, 그 의심을 어설프게 덮거나 무서워서 도망치지 마라. 차라리 끝까지 밀어붙여라. 의심할 수 있는 건 죄다 일단 치워 보고, 그렇게 다 치웠는데도 도무지 안 치워지는 단 하나가 무엇인지 찾아라. 바로 그 한 장이 네가 다시 집을 올릴 바닥이다. 의심은 집을 허무는 망치가 아니라, 어느 돌이 진짜 단단한지 가려내는 체로 쓸 때 비로소 네 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