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적 순환 (hermeneutic circle)
부분의 의미는 전체를 알아야 잡히고, 전체의 의미는 부분을 모아야 잡힌다는, 이해의 피할 수 없는 맞물림을 가리키는 말. 본래 성서와 고전 텍스트를 읽던 기술에서 나왔고, 부분과 전체 사이를 오가며 이해를 조금씩 조여 가는 과정을 뜻한다.
너, 누가 던진 한 문장 앞에서 잠깐 멈칫한 적 있을 거다. 친구가 메시지로 딱 한 줄 보냈다고 해 보자. '아니, 그게 진짜 좋아서 그러는 거야?' 이 한 줄만 떼어 놓고 보면 도무지 뜻을 못 박는다. 진심으로 좋으냐고 묻는 건지, 어이없어서 비꼬는 건지, 따지는 건지. 그런데 너는 그 앞뒤로 오간 대화 전체를 떠올리는 순간 단번에 안다. '아, 이건 비꼬는 거다.' 자,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너는 그 한 문장의 뜻을 알려고 대화 전체를 끌어왔다. 그런데 그 대화 전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문장 하나하나가 쌓여서 된 거 아닌가. 부분을 알려면 전체가 있어야 하고, 전체는 부분이 있어야 선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이 맞물림 — 오늘 이야기는 바로 이 빠져나갈 수 없어 보이는 고리에 관한 거다.
이 고리를 가장 절절하게 마주친 사람들은 원래 책을 읽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옛 성서와 고전을 옮기고 풀던 이들이었다. 한 구절의 뜻을 알려면 그 책 전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책 전체의 뜻은 구절을 하나하나 읽어야만 잡힌다. 이 답답함은 멀리 고대 교부들의 성서 읽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거기에 '부분과 전체의 순환'이라는 또렷한 이름이 붙은 건 대략 19세기 초다. 전해지기로는 프리드리히 아스트라는 고전학자가 1808년 무렵 이 맞물림을 짚었고, 그것을 신학과 법조문의 울타리 밖으로 끌어내 '무엇을 읽든 통하는 일반 원리'로 키운 사람이 독일의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768~1834)다. 그는 이렇게 봤다. 어떤 저자의 한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작품 전체를, 나아가 그 사람이 살던 언어와 시대 전체를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해란 결코 첫 줄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벽돌쌓기가 아니다. 전체에 대한 어림짐작을 품고 부분으로 들어갔다가, 부분이 어긋나면 어림짐작을 고치고, 고친 그림을 들고 다시 부분으로 돌아오는 — 끝없는 왕복이다.
이 왕복을 책에서 사람과 역사로까지 넓힌 사람이 빌헬름 딜타이(1833~1911)다. 그는 물었다. 돌멩이의 무게는 재면 그만이지만, 한 인간의 행동이나 한 시대의 사건은 어떻게 '이해'하나. 어떤 사람의 한 가지 행동은 그의 삶 전체를 알아야 뜻이 잡히고, 그 삶 전체는 행동 하나하나로만 드러난다. 똑같은 고리다. 딜타이는 이 순환이야말로 인간과 역사를 다루는 학문이 자연을 재는 학문과 갈라서는 지점이라고 봤다. 여기까지 오면 너는 슬슬 불안해진다. 부분은 전체를 전제하고 전체는 부분을 전제한다면, 이건 논리적으로 빙빙 도는 '악순환' 아닌가. 시작점이 없는데 어떻게 첫발을 떼나.
이 불안을 정면으로 받아 완전히 뒤집어 버린 사람이 20세기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다. 1927년 그의 책에서 그는 이렇게 잘라 말한다. 이 고리는 빠져나가야 할 악순환이 아니다. 중요한 건 고리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제대로 그 안으로 들어서느냐다. 그는 한 발 더 갔다. 부분과 전체를 오가는 이 맞물림은 우리가 가끔 책을 읽을 때만 빠지는 함정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의 생김새라는 거다. 너는 언제나 무언가를 미리 어림한 상태에서만 새것을 만난다. 백지에서 출발하는 이해란 아예 없다. 그러니 고리 안에 갇힌 걸 한탄할 게 아니라, 그 고리 안에 '가장 근원적인 앎의 가능성'이 숨어 있음을 알고 잘 굴리라는 것. 악순환처럼 보이던 것이, 이해가 작동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격이 올라간 순간이다.
이 도구를 가장 무르익게 휘두른 사람은 하이데거의 제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다. 1960년에 낸 묵직한 책에서 그는 이 순환을 두 지평이 만나 녹아드는 사건으로 그렸다. 네가 오백 년 전 글이나 전혀 다른 문화의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네 쪽의 시야(네가 이미 가진 짐작과 편견)와 그쪽의 시야가 부분과 전체를 오가는 왕복 속에서 서로를 밀고 당기다 마침내 더 넓은 하나의 시야로 포개지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이걸 '지평 융합'이라 불렀다. 여기서 정말 짚어야 할 반전이 있다. 우리는 보통 '내 선입견을 싹 비워야 객관적으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가다머는 정반대로 말한다. 네가 이미 품은 어림짐작이 없으면 첫 질문조차 던질 수 없다. 선입견은 지워야 할 오류가 아니라, 이해라는 왕복을 시작하게 해 주는 출발 자본이다. 다만 그 출발점을 진리로 못 박지 말고, 부분과 부딪힐 때마다 기꺼이 고쳐 나가라는 것뿐이다.
이 오래된 고리는 뜻밖에도 기계가 말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한 번 더 살아났다. 컴퓨터에게 사람의 문장을 읽히려고 보니, 낱말 하나의 뜻은 문장 전체를 알아야 정해지고 문장의 뜻은 낱말들로만 서는 — 바로 그 순환이 그대로 벽으로 나타났다. 한때는 낱말마다 규칙과 사전을 미리 박아 넣어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으면 의미가 조립될 줄 알았지만, 그 길은 번번이 막혔다. 전해지기로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일찍이 하이데거를 끌어와, 인간의 이해는 그렇게 토막을 쌓아 만드는 게 아니라 늘 전체 맥락을 미리 깔고 작동한다며 그 방식의 한계를 찔렀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언어를 다루는 인공지능이 한 단어를 풀 때 문장 전체, 나아가 글 전체를 한꺼번에 훑어 서로의 뜻을 맞춰 가며 의미를 잡아내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왕복하라는 이 옛 통찰과 닮아 있다. 낱말을 이해하려면 전체를 봐야 한다는 신학자의 깨달음이, 기계가 말을 다루는 방식의 윗단추까지 바꿔 끼우게 만든 셈이다.
그러니 너가 한 문장이든, 낯선 사람의 행동이든, 처음 보는 데이터든 도무지 갈피가 안 잡히는 무언가를 만나거든, 첫 줄부터 완벽히 이해한 뒤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욕심을 버려라. 전체에 대한 거친 어림짐작을 일단 하나 세우고 부분으로 들어가라. 부분이 그 짐작과 어긋나거든 짐작을 고치고, 고친 그림을 들고 다시 부분으로 돌아오라. 이해는 한 번에 깨치는 게 아니라, 부분과 전체 사이를 몇 바퀴씩 돌며 조금씩 조여 가는 일이다. 고리에 갇혔다고 멈추지 말고, 그 고리를 굴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