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창조 (concept creation)
이미 있는 말로는 도무지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다루기 위해, 아예 새로운 개념 하나를 지어내 사고가 그것을 움켜쥘 손잡이로 삼는 방법. 문제를 기존 개념의 틀 안에서 푸는 대신, 그 문제가 비로소 보이고 풀리게 만드는 새 개념 자체를 발명하는 일이다.
너, 분명히 거기 뭔가가 있는데 그걸 가리킬 말이 없어서 입만 벙긋거려 본 적 있을 거다. 회의 자리든 어디든, 손끝에 닿을 듯한 어떤 현상을 두고 "그러니까 그게… 뭐랄까…" 하다가 결국 남이 알아듣게 못 옮기고 만 경험. 이상한 일이다. 분명 느껴지는데, 가리킬 단어가 없으니 그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미끄러져 버린다. 반대도 있다. 누군가 딱 맞는 한 단어를 던져 주는 순간, 그동안 안개처럼 흩어져 있던 것이 갑자기 또렷한 덩어리로 손에 잡힌다. 말이 먼저 생기니까 그제야 그게 보이는 거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거꾸로 된 순서 — 보고 나서 이름 붙이는 게 아니라, 이름을 지어냈더니 그제야 보이게 되는 — 를 아예 생각의 정식 기술로 삼은 사람들에 관한 거다.
먼저 네 머릿속에 깊이 박힌 그림 하나를 흔들어 보자. 너는 지식이라는 걸 떠올릴 때 십중팔구 나무를 그린다. 굵은 뿌리에서 기둥이 서고, 기둥에서 큰 가지가 갈라지고, 거기서 잔가지가 또 갈라진다. 학문의 분류가 그렇고, 회사 조직도가 그렇고, 컴퓨터 폴더가 그렇다. 위에서 아래로, 하나의 뿌리에서 차례차례 갈라져 내려오는 위계. 우리는 이게 그냥 세상의 생긴 모양인 줄 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두 사람, 철학자 질 들뢰즈와 정신분석가 펠릭스 가타리는 이 나무 그림이 우리 사고를 가둔 감옥이라고 봤다. 세상에는 나무처럼 굴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은데 — 인터넷처럼, 소문처럼, 생태계처럼, 중심도 꼭대기도 없이 사방으로 옆으로만 뻗어 나가며 아무 데서나 끊기고 아무 데서나 다시 이어지는 것들 — 우리 머릿속엔 그걸 담을 그릇이 없었다. 나무라는 낡은 개념밖에 없으니, 자꾸 그걸 억지로 나무 모양으로 구겨 넣어 잘못 보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그들은 없던 개념 하나를 만들어 끼워 넣었다. 식물학에서 한 단어를 끌어왔는데, 바로 '리좀'이다. 땅속줄기라는 뜻이다. 잔디나 생강처럼, 기둥 없이 땅 밑으로 사방팔방 기어가며 아무 마디에서나 새 뿌리를 내리고 새 싹을 밀어 올리는 그 줄기 말이다. 어느 한 곳이 잘려 나가도 끄떡없고, 시작점도 끝점도 따로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했다. 어떤 것들은 나무가 아니라 리좀처럼 생겼다고. 자, 이 단어 하나가 들어온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봐라. 방금 전까지 "중심 없이 막 연결되는 그 뭐시기"라고밖에 못 부르던 것이, 이제 '리좀적'이라는 한 단어로 딱 잡힌다. 잡히니까 비로소 그것에 대해 또렷이 생각하고 따져 물을 수 있게 된다. 새 개념은 없던 답을 준 게 아니다. 없던 '질문할 자리'를 만들어 준 거다. 이게 개념 창조라는 사고법의 알맹이다 —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문제가 비로소 보이게 만드는 새 도구를 깎아 내는 일.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자. 새 말을 지어내는 일 자체야 인류가 늘 해 온 거다. 철학자들은 처음부터 그랬다. 다만 그걸 '철학이 하는 일의 본령'이라고 정면으로 못 박은 사람이 바로 들뢰즈와 가타리다. 둘이 함께 쓴 마지막 책, 1991년에 나온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들은 깜짝 놀랄 정의를 내린다. 철학이란 진리를 관조하는 것도, 세상을 반성하는 것도, 토론으로 소통하는 것도 아니다.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는 활동이다. 과학자가 세상의 사실을 길어 올리고 예술가가 감각의 덩어리를 빚어낸다면, 철학자가 만들어 내는 고유한 물건은 바로 '개념'이라는 거다. 그들이 보기에 다른 학문들은 이미 있는 것에 이름표를 붙일 뿐이지만, 철학은 그 개념 자체를 새로 빚어 세상에 없던 사고를 가능하게 만든다.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이 알게 모르게 해 오던 일에, 이 두 사람이 비로소 또렷한 이름과 위상을 발급해 준 셈이다.
이 도구를 가장 거침없이 휘두른 사람은 들뢰즈 자신이다. 그는 평생 개념을 깎는 장인이었다. 리좀만이 아니다. 그는 자기 사상을 펼칠 무대조차 새 개념으로 깔았는데, 위계 없이 모든 것이 같은 높이에서 펼쳐지는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것을 지어냈고, 어떤 개념을 누가 어떤 인물의 입을 빌려 사유하는가를 가리키는 '개념적 인물'이라는 장치까지 만들었다. 그가 만든 개념들은 철학 강의실에 갇히지 않았다. 리좀이라는 말은 건축가, 도시계획가, 인터넷을 설계하고 논하는 사람들, 심지어 경영과 예술 쪽으로까지 흘러 나가, 중심 없는 그물망 구조를 가리키는 공용어가 됐다. 한 사람이 식물도감에서 끌어와 새 뜻을 입힌 단어 하나가, 수십 년 뒤 전혀 다른 분야 사람들이 자기 세계를 이해하는 손잡이로 쓰이게 된 거다. 개념을 잘 만든다는 게 무슨 힘을 갖는지를 이보다 잘 보여 주는 예도 드물다.
그런데 이 사고법은 끝내 컴퓨터 앞에서 가장 가혹한 시험대에 올랐다. 기계에게 무언가를 추론시키려면, 그 기계가 다룰 개념들을 누군가 먼저 또렷이 정의해 넣어야 한다. 1990년대 초 톰 그루버라는 사람이 컴퓨터과학에서 이걸 정면으로 건드렸는데, 그는 기계가 공유할 개념의 체계를 '개념화에 대한 명시적 규정'이라고 못 박았다. 풀어 말하면 이렇다. 사람들끼리야 '친구'니 '주문'이니 하는 말을 대충 느낌으로 주고받아도 통하지만, 기계는 그 말랑한 느낌을 한 톨도 못 알아먹는다. 그래서 어떤 개념을 컴퓨터에 넣으려면, 그것이 무엇이고 무엇과 어떻게 이어지며 어디까지가 그 경계인지를 한 점의 모호함도 없이 형식으로 깎아 못 박아야 한다. 여기서 네가 정말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기계가 개념을 다루게 하려면, '개념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의 가장 윗단추부터 갈아 끼워야 했다. 사람에게 개념은 살아 있는 안개 같아서, 쓰면서 뜻이 늘어나고 맥락마다 출렁인다. 그런데 그 출렁임을 통째로 들어내고, 개념을 '명확히 정의되어 기계가 따질 수 있는 딱딱한 덩어리'로 다시 규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기계가 그걸 손에 쥐었다. 살아 있던 개념을 박제해야 컴퓨터가 만질 수 있게 되는, 묘한 맞바꿈이다.
그러니 너가 분명히 거기 있는데 도무지 가리킬 말이 없어 미끄러지는 무언가를 만나거든, 기존 단어 안에서만 빙빙 돌지 마라. 그건 네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그걸 담을 개념이 아직 세상에 없어서일 수 있다. 그럴 땐 차라리 새 이름을 하나 지어 줘라. 어설퍼도 좋으니 그 현상에 손잡이를 달아라. 손잡이가 생기는 순간, 안개였던 것이 비로소 붙잡고 따지고 풀어 볼 수 있는 물건이 된다. 그게 두 프랑스 사람이 남긴, 보고 나서 이름 붙이는 게 아니라 이름을 지어 비로소 보이게 만드는 생각의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