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철학적 방법

현상학적 환원 (epoché)

어떤 것이 실제로 바깥에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잠시 멈추고, 그것이 내 의식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충실히 기술하는 사고법.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가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 쓰던 '판단 중지'라는 말을, 20세기 후설이 경험의 구조를 엄밀히 들여다보기 위한 도구로 다시 벼려 냈다.

너, 지금 책상 위에 놓인 컵을 한번 봐라. 너는 그게 거기 '있다'고 1초도 의심 없이 믿는다. 그런데 솔직히 따져 보자. 네 눈에 들어온 건 컵의 앞면 한 조각뿐이다. 뒷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바닥도 못 봤다. 그런데도 너는 손잡이 달린 둥근 컵 하나가 통째로 거기 있다고 철석같이 여긴다. 본 적도 없는 뒷면을, 너는 어디서 가져왔나. 이 시시해 보이는 질문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한 사람이 있었고, 그가 답을 찾으려고 발명한 것이 오늘 이야기다. 핵심은 어이없을 만큼 단순하다. 컵이 '진짜로 있느냐'는 물음을 잠깐 괄호 안에 가둬 두고 옆으로 치운 다음, 오직 '내게 어떻게 나타나는가'만 곧이곧대로 들여다보는 것.

이 묘한 작업에 붙은 이름은 사실 빌려 온 말이다. 멀게는 기원전 그리스의 회의주의자들, 피론이라는 사람을 따르던 무리가 쓰던 단어다. 그들은 세상만사 어느 쪽도 확실히 알 수 없으니 판단을 아예 멈추자고 했고, 그 멈춤을 '에포케'라 불렀다. 다만 그들의 목적은 마음의 평화였다. 따지기를 그만두면 속이 편해지니까. 이 헌 단어를 서랍에서 꺼내 전혀 다른 연장으로 갈아 낸 사람이 20세기 초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이다. 그는 정반대를 노렸다. 마음 편하자고 멈추는 게 아니라, 더 정확히 보려고 멈추는 것. 우리가 눈뜨자마자 자동으로 깔아 두는 믿음 — 후설은 이걸 '자연적 태도'라 불렀다 — 곧 '저 바깥에 세계가 실재한다'는 그 깔개를, 잠시 괄호 치고 들어내자는 거였다. 대략 1907년 무렵 강의에서 이 발상을 처음 내놓았고, 1913년에 한 권의 책으로 단단히 묶어 냈다.

여기서 그가 든 깃발이 그 유명한 '사태 자체로!'다. 사물에 관해 물려받은 이론, 과학이 미리 정해 준 설명, 상식이 끼워 둔 안경 — 그 모든 군더더기를 일단 괄호에 넣고, 나타나는 것을 나타나는 그대로 받아 적자는 외침이다. 아까 그 컵으로 돌아가 보자. 환원을 걸고 다시 보면, 네가 실제로 쥔 건 컵이라는 완성품이 아니라 매 순간 한 면씩만 비치는 '옆모습들의 흐름'이다. 고개를 틀면 다른 면이 나오고, 또 틀면 또 다른 면이 나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토막난 옆모습들이 죄다 '하나의 같은 컵'을 가리키며 들어맞는다. 바로 이 맞물림, 본 적 없는 뒷면까지 미리 끌어안고 기다리는 이 의식의 솜씨를 후설은 잡아챈 거다. '있다 없다'를 따지러 달려가는 대신 멈춰 섰더니, 비로소 경험이 어떻게 지어지는지 그 골조가 드러났다.

이 연장을 가장 솜씨 좋게 휘두른 후예는 프랑스의 메를로퐁티다. 후설이 머릿속 의식에 머물렀다면, 그는 환원의 칼끝을 '몸'으로 돌렸다. 물에 반쯤 담근 막대가 꺾여 보일 때, 과학은 즉시 '빛의 굴절 때문이며 막대는 곧다'고 답을 덮어 버린다. 메를로퐁티는 그 답을 잠깐 괄호에 넣고 되물었다. 그 설명을 들이대기 전에, 내 몸에 그 막대는 애초에 '어떻게' 주어지는가. 그렇게 그는 보는 일이 머리의 계산이 아니라 세계에 던져진 몸으로 겪는 사건임을 길어 올렸다. 후설이 처음 든 멈춤 하나가, 한 세대를 건너 지각과 신체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학문으로 자라난 셈이다. 그 곁가지가 후설의 조교였던 하이데거를 거쳐 사르트르의 실존철학까지 뻗었고, 오늘날엔 심리학과 정신의학이 환자의 체험을 선입견 없이 받아 적는 면담의 방법으로도 쓰인다.

그러니 너가 어떤 현상 앞에서 곧장 '이건 원래 이런 거야', '진짜는 저거야' 하고 판정부터 내리려는 자신을 발견하거든, 그 판정의 손을 잠깐 멈춰 괄호 안에 가둬라. 존재하느냐 마느냐, 옳으냐 그르냐의 재판을 잠시 휴정하고, 지금 네 앞에 나타난 그 모습 그대로를 먼저 꼼꼼히 받아 적어라. 설명은 그다음이다. 한 철학자가 시시한 컵 한 잔에서 길어 올린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