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deconstruction)
겉보기엔 자연스러운 한 쌍의 대립항(말과 글, 안과 밖, 본질과 부수물처럼)에서 한쪽이 더 우월하다는 위계를 일단 뒤집은 뒤, 사실 그 '우월한' 쪽이 '열등한' 쪽에 몰래 기대고 있었음을 드러내 위계 자체를 흔드는 읽기의 방법.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에서 제안된, 굳어 버린 의미의 질서를 풀어 헤치는 사고법이다.
너, 누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해 놓고는 곧장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글로 적으면 또 다르잖아" 하고 발을 빼는 걸 본 적 있을 거다. 우리는 은근히 믿는다. 사람이 직접 입으로 한 말이 진짜 속마음에 더 가깝고, 종이에 적힌 글자는 그걸 옮겨 적은 그림자, 시간 지나면 오해나 사기로 변질될 수 있는 한 단계 떨어진 물건이라고. 말이 원본이고 글은 사본이라는 거다. 너무 당연해서 의심해 본 적도 없을 거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너무 당연한 위아래'를 골라잡아 거꾸로 뒤집어 보는 짓궂은 읽기에 관한 거다. 그리고 그 읽기를 한 사람은, 그 당연한 짝 하나를 평생 물고 늘어졌다.
때는 대략 1960년대, 프랑스에 자크 데리다라는 알제리 출신 철학자가 있었다. 그 무렵 학계의 왕좌엔 '구조주의'가 앉아 있었다. 세상 모든 것 — 신화든 언어든 친족 관계든 — 밑바닥엔 단단한 뼈대(구조)가 있고, 그 뼈대만 찾아내면 다 설명된다는 자신만만한 학문이었다. 1966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바로 그 구조주의의 별들이 모인 큰 학회가 열렸는데, 거기 초청된 젊은 데리다가 단상에 올라 한 일이 흥미롭다. 그는 모두가 딛고 선 그 '단단한 뼈대'라는 것 자체가 실은 고정된 중심이 없이 미끄러진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잔치에 와서 잔칫상의 다리를 흔든 셈이다. 많은 이가 훗날 이 발표를 한 시대(구조주의)가 끝나고 다음 시대가 열린 분기점으로 꼽는다. 그가 이듬해 펴낸 책들에서 이 작업에 붙인 이름이 '해체'였다.
이 말부터 짚고 가자. 데리다가 무에서 만든 단어는 아니다. 그보다 앞선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굳어 버린 전통 개념을 한 겹씩 뜯어 그 뿌리를 들여다보자는 뜻으로 쓰던 말을 가져와, 프랑스어로 옮기고 비틀어 자기 것으로 삼았다. 중요한 건 이게 '부수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망치로 깨부수는 파괴라면 그냥 'destruction'이라 했을 거다. 해체는 잘 짜인 가구를 부수지 않고 이음매를 따라 살살 분해해, 이게 사실은 어떻게 조립돼 있었는지, 어디가 억지로 끼워 맞춰져 덜그럭거리는지를 드러내는 일에 가깝다.
데리다가 평생 붙들고 끝까지 푼 예제가 바로 그 '말과 글'이다. 서양 사고는 플라톤 이래로 줄곧 말을 윗자리에, 글을 아랫자리에 놓아 왔다고 그는 봤다. 말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거기 살아 있는 '현재'에 붙어 있어 진심에 가깝고, 글은 그 사람이 떠난 뒤에도 홀로 떠도는 죽은 껍데기라는 거다. 데리다는 이 위계를 먼저 뒤집는다. 그리고 묻는다 — 그런데 말이라고 정말 그렇게 순수한가. 우리가 말을 알아듣는 건 같은 소리가 다음에도 같은 뜻으로 '되풀이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데, 그 '되풀이 가능함'이야말로 글의 성질 아닌가. 말하는 그 순간조차 나는 이미 머릿속에서 약속된 기호를 베껴 쓰고 있다. 그렇다면 글이 말을 베낀 게 아니라, 말 안에 이미 글의 성질이 먼저 들어 있던 셈이다. 윗자리가 아랫자리에 몰래 빚지고 있었다. 위아래가 무너진다. 그가 일부러 만든 단어 하나가 이 장난을 통째로 품고 있다. 그는 '차이'를 뜻하는 프랑스어를 슬쩍 비틀어 철자 하나를 바꿔 새 말을 지었는데, 바뀐 그 철자는 프랑스어에서 소리로는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오직 글로 적어야만 보인다. 말이 원본이고 글은 사본이라던 그 믿음을, 입으로는 절대 짚어 낼 수 없고 종이 위에서만 드러나는 단어 하나로 정면으로 받아친 거다.
이 도구를 가장 멀리까지 끌고 간 무대는 뜻밖에도 철학이 아니라 문학 비평이었다. 1970년대 미국, 예일 대학에 모인 비평가들 — 그중 폴 드 만이 대표 격이다 — 이 해체를 글 읽는 칼로 벼려 들었다. 그들은 위대하다는 작품을 붙들고, 그 글이 스스로 내세운 주장과 그 글이 실제로 굴러가는 방식이 서로 발을 거는 지점을 집요하게 찾아냈다. 모든 글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배반하는 틈을 품고 있다는 거였다. 한동안 이 읽기는 인문학 전체를 뒤흔들 만큼 위세를 떨쳤다. 물론 반발도 거셌다. 무엇이든 다 흔들어 놓기만 하면 결국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로 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평생 데리다를 따라다녔고, 그는 해체가 아무 말 대잔치가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고 따라가는 엄격한 읽기라고 거듭 받아쳤다.
그러니 너가 '이건 원래 이런 거야, 당연하잖아' 소리를 들었을 때 — 본질이 먼저고 포장은 나중이라거나, 이성이 위고 감정은 아래라거나, 원본이 진짜고 복제는 가짜라는 식의 그 자연스러운 위아래를 만나거든 — 한번 짓궂게 뒤집어 봐라. 아랫것이라 깔보던 쪽을 잠깐 위에 올려놓고 물어라. 사실은 저 잘난 윗쪽이 이 아랫쪽 없이는 한순간도 못 서는 것 아닌가. 그 한 번의 뒤집기가, 너무 단단해 보여 아무도 안 건드리던 전제에 처음으로 금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