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철학적 방법

정명 (正名, rectification of names)

이름과 실제가 어긋났을 때, 실제를 적당히 덮는 대신 이름을 실제에 맞게 바로잡아 그로부터 말과 행위와 질서까지 바로 세우려는 사고법.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워야 한다'는 동아시아의 오랜 가르침에서 나왔으며, 이름이 흐트러지면 세상이 흐트러진다고 본다.

너, 어느 회사에 '팀장'이라 적힌 명함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실제로는 아무도 그의 지시를 안 듣고 그도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자리를 본 적 있을 거다. 직함은 '팀장'인데 실제는 팀장이 아니다. 처음엔 사소한 호칭 문제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묘하게 모든 게 삐걱거린다. 회의에서 누가 결정권자인지 아무도 모르고, 일이 떠넘겨지다 공중에 뜨고, 상벌은 엉뚱한 사람에게 떨어진다. 이름 하나가 실제와 어긋났을 뿐인데, 그 어긋남이 위로 옆으로 번져 조직 전체가 안개에 잠긴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이 '이름과 실제의 어긋남'을 이천오백 년 전에 이미 천하가 무너지는 첫 단추로 지목한 한 사람에 관한 거다.

배경은 어지러웠다. 대략 기원전 5세기, 여러 제후국이 서로 잡아먹던 시절의 중국. 위(衛)나라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본래 자리를 이어야 할 아버지가 쫓겨나 나라 밖을 떠도는데, 그 아들이 임금 자리에 떡 앉아 버린 거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아들이 임금이라니. 그러면 그 아들은 '임금'인가 '자식'인가. 이름과 핏줄과 자리가 서로를 물어뜯는 이 뒤틀린 판에서,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만일 저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께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스승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반드시 이름부터 바로잡겠다. 이 사람이 공자다. 그리고 그가 입에 올린 그 '이름을 바로잡는다', 곧 정명(正名)이라는 말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여기서 진짜 장면이 펼쳐진다. 제자 자로는 성격이 불같고 입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스승의 대답을 듣고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기껏 이름 따위를 바로잡겠다니, 선생님은 어쩜 그리 물정 모르고 한가하십니까. 그 한가하다는 말, 원문으로는 '우(迂)' — 빙 돌아가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쓸데없이 고지식한이라는 뜻이다. 제자가 스승의 면전에서 비웃은 거다. 너라면 이쯤에서 스승이 어물어물 변명하리라 예상하겠지. 그런데 공자는 도리어 받아쳤다. 거칠구나, 너 자로야. 그러고는 한가하기는커녕 서늘하게 정확한 도미노 한 줄을 세워 보였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와 악이 일어나지 않고, 예와 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며, 형벌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백성은 손발을 어디 둬야 할지조차 모르게 된다. 봐라. 호칭 하나 틀어진 데서 출발해 마지막엔 백성이 발 디딜 자리를 잃는 데까지 단숨에 굴러간다. 자로가 '겨우 이름'이라 비웃은 그 작은 첫 칸이, 실은 나라 전체를 무너뜨리는 첫 도미노였던 거다. 이 한 토막이 정명이라는 사고가 세상에 처음 또렷이 박힌 자리다.

원래 공자의 정명은 무엇보다 사람의 자리에 관한 가르침이었다. 다른 자리에서 그는 정치를 묻는 임금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전한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이름값을 하라는 거다. '임금'이라 불린다면 임금이라는 이름이 요구하는 실제를 채워라, 못 채우면 그건 이름과 실제가 어긋난 가짜다. 정명은 이렇게 흐트러진 신분과 역할을 제자리로 돌리는 정치의 도구로 먼저 쓰였다.

이 씨앗을 정교한 이론으로 키워 올린 사람은 대략 기원전 3세기의 순자다. 그는 아예 '정명'이라는 제목을 단 한 편의 글을 따로 써서, 스승의 막연한 가르침을 언어에 관한 거의 체계적인 사유로 밀어붙였다. 순자의 통찰이 매섭다. 이름과 사물 사이엔 본래 정해진 끈이 없다, 어떤 것을 무엇이라 부를지는 사람들이 함께 약속해 굳힌 결과일 뿐이다 — 약속이 쌓여 풍속이 된다는, 약정속성(約定俗成)이라는 생각이다. 끈이 본래 없으니, 옛 성왕이 애써 실제에 맞게 묶어 둔 이름을 후대가 아무렇게나 풀어 새 말을 마구 지어내면 옳고 그름을 가릴 잣대 자체가 무너진다고 그는 경고했다. 정명이 '신분 바로잡기'에서 '말과 세계를 어떻게 묶을 것인가'라는 한 단계 높은 물음으로 올라선 순간이다.

그런데 이 도구를 가장 차갑고 실용적으로 휘둘러 실제로 천하를 움직인 쪽은, 뜻밖에도 공자의 후예가 아니라 법가였다. 신불해와 한비자 같은 이들은 정명을 윤리에서 떼어내 통치 기술로 깎아냈다. 그들의 손에서 정명은 형명(刑名), 곧 '이름과 실적을 맞춰 본다'는 장치가 됐다. 작동 방식은 단순하고 무섭다. 신하가 어떤 자리의 이름을 받으며 무엇을 하겠다 말하면, 군주는 그 말한 이름과 실제 해낸 실적을 나란히 놓고 대조한다. 말한 만큼 정확히 해냈으면 상, 모자라도 벌, 심지어 말보다 넘치게 해내도 벌이다. 왜 넘쳐도 벌인가. 이름과 실제가 어긋났으니까 — 자기 직분의 이름을 벗어났으니까. 감정도 인맥도 끼어들 틈 없이, 오직 이름과 실적의 일치 여부만으로 사람을 부린 이 냉혹한 장치로 그들은 거대한 관료 기구를 굴렸고, 끝내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는 행정의 골격이 됐다. 공자가 도덕의 언어로 세운 정명이, 법가의 손에서 제국을 운영하는 기계 부품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가 보자. 이름과 실제를 맞춰 본다는 그 오래된 발상은, 따지고 보면 오늘날 컴퓨터와 데이터가 매일 부딪히는 문제와 닮았다. 거대한 시스템에서 어떤 항목에 붙은 이름표가 실제 그것이 하는 일과 어긋나기 시작하면, 잘못된 이름표를 타고 오류가 조용히 번진다. 이름을 어떻게 정의하고 무엇과 묶을지를 깐깐하게 다스리는 일 —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들이 골머리를 앓는 그 일의 뿌리에도, 이름이 실제와 어긋나면 그 위에 쌓은 모든 게 흔들린다는 똑같은 직관이 깔려 있다. 다만 동아시아의 정명은 본디 컴퓨터를 향한 적이 없는, 사람과 사회를 향한 가르침이었다는 것만은 잊지 말자.

그러니 너가 무언가 이상하게 자꾸 삐걱거리는데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한 상황을 만나거든, 화려한 해법으로 달려들기 전에 가장 시시해 보이는 것부터 의심하라. 여기서 부르는 이름이 실제와 맞는가. '팀장'은 정말 팀장인가, '완료'는 정말 완료인가, '합의'는 정말 합의인가. 어긋난 이름 하나를 찾아 실제에 맞게 바로잡는 그 시시한 첫 칸이, 자로가 비웃었다가 머쓱해진 바로 그 첫 도미노다. 이름이 바로 서야 그 위의 말이 서고, 말이 서야 비로소 일이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