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회적·집단적 숙의

명목집단법 (nominal group technique)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아이디어를 모으되, 먼저 각자 말없이 종이에 따로 적은 다음 그것을 모아 함께 평가하고 순위를 매기는 회의 기법이다. 입을 열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이게 해서, 목소리 큰 사람이나 윗사람의 의견에 다른 의견이 묻혀버리는 일을 막는다. 집단으로 모여 있지만 발상의 첫 단계만은 개인으로 떼어 놓는다는 뜻에서 명목상의 집단이라 부른다.

너, 회의실에 앉아 있다고 해보자. 부장이 먼저 입을 연다. 나는 이게 답인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굳는다. 속으로는 그건 좀 아닌데 싶은 사람도 있다. 더 좋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막 떠오르려던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아무도 먼저 손을 들지 않는다. 둘째로 말하는 사람은 부장 말에 토를 다는 셈이 되고, 셋째로 말하는 사람은 이미 형성된 분위기를 거스르는 셈이 된다. 결국 회의는 부장이 처음 던진 그 안 언저리에서 맴돌다 끝난다. 너도 이런 방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닐 거다. 분명히 여럿이 모였는데, 머릿수만큼의 생각이 나오질 않는다.

이 답답함을 처음 정면으로 들여다본 사람들이 있다. 1960년대 말,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앙드레 델베크와 앤드루 반 데 벤이라는 두 경영학자다. 이들은 원래 시민 참여 계획이라는 현장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가난한 동네의 주민들을 모아놓고 우리 동네에 뭐가 필요한지 의견을 듣는 자리를 자꾸 열었는데, 매번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말 잘하고 목소리 큰 몇 사람이 회의를 통째로 끌고 가버리고, 정작 가장 절실한 사정을 가진 조용한 주민들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더라는 거다. 두 사람은 깨달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을 꺼내는 순서와 방식이 잘못됐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들이 짜낸 처방은 의외로 단순했다. 말부터 시키지 말고, 글부터 쓰게 하자.

이렇게 해보는 거다. 사회자가 질문 하나를 칠판에 적는다. 우리 부서 일이 자꾸 늦어지는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그러고는 곧장 토론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고 침묵을 명한다. 오 분이든 십 분이든, 각자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적는다. 옆 사람이 뭘 쓰는지 보이지도 않고, 누가 직급이 높은지도 이 순간만은 상관이 없다. 그다음에야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기가 적은 것 중 하나를 소리 내어 말하고, 사회자는 그걸 토씨도 평가도 없이 칠판에 그대로 옮겨 적는다. 이게 좋다 저게 나쁘다 따지는 건 모든 항목이 다 나온 다음으로 미룬다. 마지막에는 각자 그 목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몇 개를 골라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를 합산해서 순위를 낸다. 누구의 말솜씨도, 누구의 직급도 아닌, 종이에 적힌 표의 무게로 결론이 정해진다. 델베크와 반 데 벤은 이 방식에 명목집단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집단이긴 한데, 발상의 첫 단추를 끼울 때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명목상의 집단이라는 뜻이다.

왜 하필 이 순서가 그렇게 큰 차이를 낳을까. 보통의 회의에서는 한 사람이 말하는 동안 나머지는 듣기만 해야 한다. 그사이 떠오른 내 생각은 남의 말에 가려지고, 먼저 나온 의견에 다들 슬그머니 끌려간다. 심리학자들이 집단사고라 부르는, 모두가 한 방향으로 쏠려 반대 의견이 사라지는 그 함정이다. 명목집단법은 발상과 평가를 시간 위에서 떼어 놓는다. 혼자 적는 동안에는 누구도 누구에게 영향을 못 주니 생각의 다양성이 그대로 살아남고, 함께 점수 매기는 단계에서는 개인의 판단들이 합쳐져 집단의 지혜가 된다. 처음엔 보건의료와 정부 사업 기획에서 주로 쓰이다가, 곧 기업의 신제품 회의나 우선순위 정하기로 퍼져나갔고, 지금은 멀리 흩어진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먼저 각자 제안을 올린 뒤 다 같이 투표하는 원격 협업 방식으로까지 이어진다. 도구는 종이에서 화면으로 바뀌었지만, 입보다 손이 먼저라는 그 핵심은 육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다.

그러니 네가 여럿을 모아놓고 진짜 좋은 답을 끌어내야 하는 자리를 만나거든, 다짜고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지 마라.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종이를 돌려 각자 조용히 적게 하고, 그것을 다 모은 다음에야 함께 따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