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회적·집단적 숙의

숙의 (deliberation)

숙의란 다양한 참여자가 충분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이유를 주고받는 토의를 거쳐 결론에 이르는 의사결정 방식이다. 단순히 머릿수를 세는 투표와 달리, 입장이 왜 그러한지를 따지고 더 나은 근거 앞에서 자기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선다. 결과보다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의 정당성을 중시한다.

너, 친구 여섯이서 저녁에 뭘 먹을지 정한다고 해보자. 가장 빠른 길은 손을 드는 거다. 셋이 국밥, 둘이 파스타, 하나가 아무거나. 국밥이 이겼다. 깔끔하다. 그런데 파스타를 외쳤던 한 명이 사실 어제도 국밥을 먹었고, 아무거나라던 친구는 속이 안 좋아 뜨끈한 국물을 원했다는 걸, 손을 드는 그 방식은 끝내 듣지 못한다. 표는 결론을 내지만 이유를 버린다. 그래서 진 쪽은 납득이 아니라 체념을 한다. 다음에 또 진다고 느끼면, 아예 손을 들기를 그만둔다.

이유까지 식탁에 올려놓고 서로 설득해 보자는 생각, 그래서 누군가는 자기 첫 고집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더 나은 근거 쪽으로 옮겨 앉게 하자는 생각. 이걸 어렵게 부르면 숙의다. 핵심은 머릿수가 아니라 주고받는 이유의 무게다. 표결은 사람들의 굳은 선호를 그냥 집계하지만, 숙의는 대화를 거치며 그 선호 자체가 바뀔 수 있다고 본다.

이 말은 새 발명이 아니다. 멀리는 고대 아테네 민회와 추첨으로 뽑힌 시민 법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는 누구든 일어나 말할 권리가 있었고, 결정 전에 찬반 양쪽의 연설을 듣는 것이 절차였다. 다만 그것을 하나의 정밀한 사고법으로 벼려 낸 건 한참 뒤다. 1980년대,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이상적 대화 상황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모두가 동등하게 발언하고,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오직 더 나은 논증의 힘만이 결론을 끌어가는 자리. 비슷한 무렵 미국의 존 롤스도 공적 이성을 말하며, 공동의 문제는 서로가 합당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로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때부터 숙의는 그냥 회의를 잘하자는 권유가 아니라, 정당성이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이론이 됐다.

추상에 머물 뻔한 이 생각을 땅으로 끌어내린 사람이 있다. 정치학자 제임스 피시킨이다. 그는 의심했다. 사람들에게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토론 시간을 주면 의견이 정말 달라질까, 아니면 처음 가진 편견 그대로일까. 그래서 직접 실험을 설계했다. 여론조사처럼 무작위로 시민을 뽑되, 전화로 의견만 묻고 끝내지 않았다. 한자리에 모아 균형 잡힌 자료집을 쥐여 주고, 전문가에게 따져 물을 시간을 주고, 작은 모둠으로 며칠을 토론하게 한 뒤, 처음과 끝의 생각을 다시 쟀다. 숙의형 여론조사라 불린 이 방식의 결과는 한결같았다. 사람들의 의견은 실제로 움직였다. 텍사스에서 전력 회사들과 함께 한 토론에서, 평범한 시민들은 처음엔 값싼 화석연료를 원했지만, 비용과 환경을 충분히 따진 끝에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에 기꺼이 돈을 더 내겠다고 돌아섰다. 그 결론이 실제 주 정책에 반영돼 텍사스가 한동안 풍력 발전 1위 주가 된 것은, 숙의가 탁상 위의 이상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준 장면이다.

이 방법은 더 큰 무대로도 올라갔다. 2016년 아일랜드는 낙태라는, 표결로 갈라치면 사회가 두 동강 날 주제를 시민의회에 맡겼다. 무작위로 뽑힌 백 명 가까운 시민이 몇 달간 전문가와 당사자의 증언을 듣고 숙의한 끝에 헌법 개정을 권고했고, 그 권고가 국민투표로 이어져 실제로 법이 바뀌었다. 정치인들이 손대기를 두려워한 뇌관을, 충분히 정보를 받은 보통 사람들의 토의가 풀어낸 것이다.

다만 정직하게 짚자. 이 사고법은 컴퓨터가 대신해 주지 못한다. 핵심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유가 오가며 마음이 실제로 바뀌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플랫폼이 더 많은 사람을 토론에 부르고 의견 지형을 지도로 보여 줄 수는 있어도, 듣고 흔들리고 고쳐 앉는 그 일만은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니 너가 여섯이 모인 식탁이든 회사 회의실이든, 의견이 갈려 당장 손을 들어 끝내고 싶은 순간을 만나거든, 한 박자만 늦춰라. 표를 세기 전에 먼저 물어라. 너는 왜 그걸 원하느냐고. 이유가 식탁에 다 오른 다음에야 세는 표라야, 진 쪽도 체념이 아니라 납득으로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