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회적·집단적 숙의

다수결 (majority vote)

다수결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갈릴 때 표를 세어 더 많은 쪽의 뜻을 집단 전체의 결정으로 삼는 방법이다. 모두가 동의하지 않아도 과반 혹은 최다 득표만으로 결론을 확정하기에, 만장일치를 기다리지 않고도 빠르게 매듭짓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회의, 선거, 재판 배심까지 폭넓게 쓰인다.

너, 친구 다섯 명과 저녁에 뭘 먹을지 정해야 한다고 해보자. 한 명은 국밥, 두 명은 치킨, 두 명은 파스타. 끝까지 서로를 설득하면 누군가는 이기겠지만 배는 점점 더 고파진다. 그래서 너는 짜증을 누르고 말한다. 손 들어, 많은 쪽으로 가자. 이 한마디가 사실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갈고닦은 결정 장치다. 모두를 만족시키려 무한정 버티는 대신, 머릿수를 세어 더 많은 쪽에 결정권을 넘기는 것. 너무 당연해서 발명이라 부르기도 멋쩍지만, 이 당연함이 자리 잡기까지는 길고 피 흘리는 역사가 있었다.

처음 이걸 제도로 또렷하게 굴린 곳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다. 민회에서 시민들이 손을 들어 표를 셌고, 그보다 더 흥미로운 건 도편추방이라는 장치였다. 위험해 보이는 정치가의 이름을 깨진 도자기 조각에 적어 내고, 그 조각이 일정 수를 넘으면 그 사람을 십 년간 도시 밖으로 내보냈다. 다수의 두려움이 한 사람을 추방하는, 다수결의 가장 날것의 얼굴이었다. 로마 원로원도 표결로 갈렸고, 중세 수도원은 수도원장을 뽑을 때 형제들의 표를 셌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은 곧 기분 나쁜 진실을 마주한다. 다수가 많다고 옳은가.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것도 아테네 시민 다수의 표였다.

그 불편함을 수학으로 정면으로 두들긴 사람이 18세기 프랑스의 콩도르세다. 수학자이자 혁명기의 정치가였던 그는 1785년에 한 가지를 증명한다. 만약 투표하는 각 사람이 옳은 답을 맞힐 확률이 절반보다 조금이라도 높다면, 사람 수가 늘어날수록 다수의 결정이 옳을 확률은 거의 1에 수렴한다. 이게 그 유명한 콩도르세 배심정리다. 한 사람의 판단이 51퍼센트짜리 동전이어도, 수백 명이 모여 다수로 정하면 그 집단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는 것. 다수결이 단순한 머릿수 싸움이 아니라 오류를 깎아내는 기계일 수 있음을 그가 처음으로 증명했다. 그런데 같은 콩도르세가 동시에 그 반대편 함정도 발견했다. 셋 이상의 선택지를 두고 사람들의 선호가 엇갈리면, A가 B를 이기고 B가 C를 이기는데 정작 C가 A를 이기는 순환이 생긴다. 다수의 뜻이 빙글빙글 돌아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역설. 다수결을 가장 깊이 신뢰한 사람이 동시에 그 한계의 지도까지 그린 셈이다. 그는 결국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감옥에서 죽었지만, 그가 남긴 두 정리는 오늘까지 살아 있다.

그 위에 한 세기 반 남짓 뒤 케네스 애로라는 경제학자가 더 가혹한 못을 박았다. 여러 사람의 선호를 하나의 집단 선택으로 모으는 완벽하게 공정한 규칙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1951년에 수학적으로 증명해 훗날 노벨상을 받았다. 그러니 다수결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결함을 안고도 그나마 가장 견딜 만하기에 쓰이는 도구다.

흥미로운 건 콩도르세의 직관이 지금 네 손안의 기계 속에서 펄펄 살아 있다는 점이다. 약한 판단기를 잔뜩 모아 표결시키면 강해진다는 그 생각이 기계학습의 앙상블, 랜덤 포레스트의 핵심이다. 수천 개의 엉성한 결정나무가 저마다 표를 던지고, 가장 많은 표를 받은 답을 최종 출력으로 삼는다. 51퍼센트짜리 약한 학습기들의 다수결이 하나의 똑똑한 모델을 이긴다.

그러니 너가 여러 의견이 갈려 결정을 못 내리는 상황을 만나거든, 두 가지를 같이 기억해라. 각자가 절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판단을 한다면 머릿수를 세는 것이 의외로 강력하다는 것, 그러나 선택지가 셋을 넘고 순서를 누가 정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뒤집힌다면 그 다수결은 진실이 아니라 진행 절차가 만든 착시일 수 있다는 것. 표를 세되, 무엇을 표에 올렸는지를 먼저 의심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