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브루타 (chavruta)
하브루타는 둘 또는 셋이 짝을 이뤄 같은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고, 서로에게 끊임없이 캐물으며 논쟁하는 유대 전통의 공부 방식이다. 혼자 머릿속으로 삭이는 대신, 짝의 반박을 거울 삼아 자기 논리의 허점을 드러내고 벼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교사가 답을 내려주는 강의와 달리, 정답보다 더 날카로운 질문을 만들어 내는 데 무게를 둔다.
너,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를 떠올려 봐라. 다들 입을 다물고, 기침 소리 하나에도 눈치를 본다. 조용해야 집중이 된다고 우리는 배웠다. 그런데 지구 어딘가에는, 공부하는 방이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야 정상인 곳이 있다. 예시바라고 부르는 유대인의 학당에 처음 들어선 사람은 다 놀란다. 수백 명이 둘씩 마주 앉아, 책 한 권을 펴 놓고 삿대질을 해 가며 고래고래 따진다. 조는 사람이 없다. 졸 수가 없다. 앞에 앉은 짝이 끊임없이 너를 물고 늘어지니까.
그 짝을 부르는 말이 하브루타다. 본래는 '친구', '동료'라는 뜻의 아람어 하베르에서 온 말인데, 어느새 그 친구와 함께 공부하는 방식 자체를 가리키게 됐다. 핵심은 단순하다. 같은 구절을 둘이 소리 내어 읽고, 한 사람이 해석을 내놓으면 다른 사람이 곧장 그게 왜 그러냐고 캐묻는다. 동의하려고 만난 게 아니다. 반박하려고 만난 거다. 네가 "이 구절은 이런 뜻이다" 하면 짝은 "그럼 바로 다음 줄과는 어떻게 맞아떨어지냐"고 물고, 너는 막혀서 다시 읽고, 그러다 처음 보지 못한 결을 발견한다. 혼자였다면 그냥 고개 끄덕이고 넘어갔을 자리에서.
이게 어디서 왔는지 거슬러 올라가면, 2천 년 가까이 된 탈무드 자체가 통째로 이 방식의 화석이다. 탈무드를 펴 보면 한 페이지 안에서 랍비들이 서로 다투고 있다. 힐렐 학파는 이렇게 말했고 샴마이 학파는 저렇게 말했다, 하고 두 의견을 나란히 박아 둔다. 놀라운 건, 진 쪽 의견도 지우지 않고 남겨 둔다는 거다. 틀린 길까지 적어 둬야 왜 그 길이 막다른지 다음 사람이 안다는 발상이다. 탈무드에는 아예 이런 말이 나온다. 친구를 통하지 않고는 배울 수 없다고. 외톨이로 앉아 책장만 넘기는 공부를 두고, 그러면 어리석어진다고까지 못을 박았다.
이 전통을 가장 깊이 밀고 간 사람들을 꼽자면, 중세 북프랑스의 라쉬와 그 사위·손자들이다. 11세기 라쉬가 탈무드에 촘촘히 주석을 달아 누구나 따라 읽을 길을 터 놓자, 그 손자뻘 되는 토사피스트라 불린 학자 무리가 그 주석에 또 반론을 달았다. 할아버지 글에 손자가 "여기는 다릅니다" 하고 대드는 셈이다. 권위에 입 다무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더 거세게 따지는 것. 그렇게 한 구절을 두고 세대를 건너뛰며 논쟁이 쌓였고, 그 축적이 곧 유대 학문의 몸통이 됐다. 짝과 캐묻는 습관이 없었다면 이 두툼한 반박의 탑은 서지 못했다.
그런데 잘 보면, 이건 유대인만의 비법이 아니다. 멀리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길거리에서 청년을 붙들고 "용기가 무엇이냐" 물었다가, 청년이 답하면 "그럼 후퇴할 줄 아는 것도 용기 아니냐"고 되받아 막히게 만든 그 문답법과 뼈대가 같다. 혼자 끄덕이게 두지 않고, 묻는 자를 옆에 세워 생각의 이음매를 흔드는 것. 다른 점이라면 소크라테스는 한 명이 줄곧 묻고 한 명이 답했지만, 하브루타는 둘이 번갈아 칼과 숫돌을 맞바꾼다는 데 있다. 오늘은 네가 묻고 다음 장에선 네가 답하다 막힌다. 그래서 어느 한쪽이 선생으로 굳지 않는다.
요즘은 이 오래된 방식이 학당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스라엘이 인구에 비해 유난히 많은 창업가와 노벨상 수상자를 낸 비결을 들여다본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짝지어 따지며 자란 교육 습관을 자주 지목한다. 권위에 곧이곧대로 수긍하지 않고 "왜요"를 입에 달고 사는 태도 말이다. 한국에서도 한동안 이 이름이 교육계를 휩쓸었다. 다만 여기엔 함정이 있다. 짝이 무르면 하브루타는 그냥 잡담이 된다. 좋은 짝은 너를 편들지 않는 짝이다. 네 논리의 가장 약한 못을 찾아 거기를 친다.
그러니 네가 어떤 생각이 옳다고 확신이 설 때, 바로 그때 누군가를 마주 앉혀라. 동의해 줄 사람 말고, 기어이 반대편에 서서 너를 막아 줄 사람을. 그리고 그가 막은 자리를 부끄러워 말고 거기서 다시 읽어라. 네 생각의 진짜 모양은, 혼자 끄덕일 때가 아니라 누가 물고 늘어질 때 비로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