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주의 (reductionism)
복잡하고 알 수 없어 보이는 것을, 그것을 이루는 더 단순한 구성요소와 그 요소들이 따르는 법칙으로 쪼개어 설명하려는 사고법. 전체란 결국 부분들의 합이며, 부분을 남김없이 알면 전체도 저절로 풀린다고 보는 입장이다. 위층의 학문은 아래층의 학문으로 되돌려 풀 수 있다고 — 생물은 화학으로, 화학은 물리로 — 가정한다.
너, 어릴 때 멀쩡히 돌아가는 손목시계 뒤뚜껑을 한 번쯤 따 보고 싶었을 거다. 바늘이 저 혼자 또박또박 움직이는 게 도무지 신기해서. 그러다 정말로 뒤를 열어 보면, 신기함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안에는 톱니바퀴가 맞물려 있고, 태엽이 풀리며 그걸 밀고, 작은 추가 좌우로 흔들리며 박자를 끊어 줄 뿐이다. '마법'이라 느꼈던 그 움직임이, 알고 보니 톱니 몇 개의 맞물림으로 남김없이 설명되는 거다. 그 순간 네 머릿속에는 아주 강력한 믿음 하나가 자리 잡는다. 아무리 신비해 보이는 것도 뚜껑을 열고 부품 단위로 쪼개 놓으면, 결국 단순한 것들의 맞물림으로 다 풀린다는 믿음. 오늘 이야기는 이 믿음에 관한 거다. 인류가 가진 가장 날카롭고 가장 성공적인 칼이면서, 동시에 어느 지점에서 보기 좋게 손을 베이는 칼.
이 믿음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시계보다 훨씬 앞선다. 대략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레우키포스와 그 제자 데모크리토스가 던진 한 문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빈 공간뿐이다. 세상의 그 모든 빛깔과 맛과 향과 부드러움이 사실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알갱이들이 어떻게 모이고 배열되었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거였다. 꿀이 단 것도, 쇠가 단단한 것도 알갱이의 모양과 짜임 때문이라고. 증거 하나 없이 순전히 생각만으로, 이들은 복잡한 세계 전체를 단순한 부품의 배열로 '되돌려 풀어' 버린 셈이다. 복잡한 위를 단순한 아래로 되돌려 환원한다 해서, 한참 뒤 이 태도에 환원주의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러니 이건 누가 어느 날 발명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도대체 이게 뭘로 되어 있지'를 처음 물은 순간부터 품어 온 충동에 후대가 이름표를 달아 준 것에 가깝다.
이 충동이 한낱 짐작을 넘어 근대 과학 전체의 작업 방식으로 굳어진 게 핵심이다. 과학자들은 암묵적으로 한 줄로 선 사다리를 그렸다. 맨 위에 마음이 있고, 그 아래 생물이, 그 아래 화학이, 맨 밑에 물리가 있다. 그리고 위층의 수수께끼는 한 칸 아래로 내려 풀면 된다고 믿었다. 살아 있다는 신비는 화학 반응으로, 화학 반응은 원자의 물리로. 이 사다리 타고 내려가기가 얼마나 무섭게 잘 들었는지를 보여 주는, 끝까지 풀린 사건 하나를 따라가 보자.
20세기 중반까지 생물학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단어가 하나 있었다. '유전자.' 부모를 닮은 자식이 태어나고, 생명이 제 모습을 정확히 베껴 다음 세대로 넘기는 그 능력. 다들 무언가가 그 정보를 나른다는 건 알았지만, 그 '무언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었다. 그런데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결정적인 엑스선 사진에 크게 빚지며 — 그 추상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유전자란 별게 아니라 DNA라는 한 분자의 생김새였다. 두 가닥이 꼬인 사다리 모양인데, 그 가로대를 이루는 네 가지 부품이 짝을 지을 때 아데닌은 반드시 티민하고만, 구아닌은 반드시 시토신하고만 맞물린다. 바로 여기서 그 모든 신비가 풀린다. 한 가닥만 있으면 짝이 정해져 있으니 나머지 가닥이 저절로 결정된다 — 생명이 자기를 복제한다는 그 까마득한 마법이, 톱니가 정해진 짝하고만 맞물리는 것처럼 단순한 화학적 끼워 맞춤의 당연한 결과로 내려앉은 거다. 생물학의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가 분자 하나의 모양으로 환원되는 순간이었다. 시계 뒤뚜껑을 열었더니 톱니가 보이듯이.
크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칼을 쥔 사람 중 가장 대담한 자가 그였다. 그는 평생을 더 산 뒤,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성역에 같은 칼을 들이댔다. 의식, 그러니까 '나'라는 느낌 말이다. 1994년 그가 펴낸 책의 제목은 '놀라운 가설'이었고, 그 가설은 이런 거였다. 너의 기쁨과 슬픔, 너의 기억과 야망, 네가 너 자신이라 느끼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한 무더기의 신경세포와 그것들을 둘러싼 분자들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책 첫머리에 도발하듯 적었다. 너는 한 다발의 신경세포일 뿐이다. 영혼마저 뚜껑을 열면 결국 세포의 맞물림으로 환원된다는, 환원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인 선언이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이 칼이 손을 벤다. 그 긴장을 가장 정직하게 세운 사람은 환원주의의 적이 아니라, 누구보다 환원주의를 잘 아는 한 물리학자였다. 1972년, 훗날 노벨상을 받는 필립 앤더슨이 과학 학술지에 짧은 글 하나를 실었다. 제목은 '많아지면 달라진다.' 그는 환원주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게 결국 입자물리 법칙을 따른다는 데 그도 동의했다. 그가 찌른 건 다른 지점이다. 모든 걸 부품으로 쪼개 내려갈 수 있다 해서, 그 부품 법칙만 쥐고 거꾸로 위층을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알갱이 하나하나의 규칙을 다 안다고 그것이 엄청나게 많이 모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예측되지 않는다. 단계가 한 칸 올라갈 때마다, 아래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성질과 새로운 법칙이 솟아난다. 물 분자 하나에는 '젖음'도 '소용돌이'도 없지만 분자가 떼로 모이면 그게 나타나듯이. 그래서 그는 못 박았다. 화학은 적용된 물리학이 아니고, 심리학은 적용된 생물학이 아니라고. 쪼개 내려가는 길과 쌓아 올라오는 길은 결코 같은 길이 아니라는 거다. 부품을 다 안다고 전체가 저절로 풀린다는 그 손목시계의 믿음에, 정중하지만 단호한 금이 간 셈이다.
이 환원의 칼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대한 규모로 휘둘러지는 자리는 뜻밖에도 네 손안의 컴퓨터다. 이 기계의 밑바닥엔 오직 두 가지, 켜짐과 꺼짐밖에 없다.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0과 1, 그리고 그것들을 묶는 몇 안 되는 논리 동작만으로 — 세상의 모든 숫자와 글자와 사진과 음악과 추론이 남김없이 환원되어 표현된다. 일찍이 1937년, 클로드 섀넌이라는 젊은이가 사람의 논리적 사고를 전기 스위치의 켜고 끔으로 고스란히 옮길 수 있음을 보여 준 게 그 씨앗이었다. 여기서 네가 정말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기계에게 이 환원을 시키려면, 사람 머릿속 생각의 가장 윗단추부터 갈아 끼워야 했다는 거다. 그전까지 '의미'란 사람 마음속에만 깃드는 신성한 무엇이었다. 그런데 컴퓨터를 부리려면, 그 의미라는 것조차 아무 뜻도 없는 켜짐과 꺼짐을 산더미처럼 쌓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받아들여야 했다. 뜻 없는 부품에서 뜻이 자라난다는, 생각의 틀 자체를 뒤집는 도약이 있고서야 비로소 오늘의 모든 소프트웨어가 섰다. 데모크리토스가 세계를 알갱이로 되돌려 풀던 그 동작이, 형태만 바꿔 네 주머니 속에서 매 순간 돌아가고 있는 거다.
그러니 너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무언가 앞에 섰을 때 — 그게 알 수 없이 무너진 사업이든, 속을 모르겠는 조직이든 — 일단 시계 뒤뚜껑을 열듯 부품 단위로 쪼개 내려가 하나씩 들여다봐라. 그 환원의 칼은 인류가 가진 가장 잘 드는 칼이 맞다. 다만 앤더슨의 경고를 칼집에 새겨 둬라. 어떤 전체의 정체는 부품 안이 아니라 부품들 사이의 맞물림에 살고 있어서, 다 분해해 늘어놓는 순간 정작 보고 싶던 그것이 증발해 버린다. 풀어헤쳐 부품을 알되, 전체가 부품의 합에 불과하다고는 믿지 마라. 그 두 가지를 함께 쥐는 손이, 가장 멀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