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체계·구조

창발 관점 (emergence)

낱낱의 부분을 아무리 뜯어봐도 나오지 않는 성질이, 부분들이 어떤 규모로 얽히는 순간 위층에서 통째로 새로 솟아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 물 분자 하나에는 없는 '젖음'이 물에는 있듯, 상위의 질서는 하위의 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 새 질서를 아래로 쪼개 설명하려 들지 않고, 그것 자체를 하나의 층위로 보는 것이 핵심이다.

너, 손에 물 한 컵을 들고 있다고 해보자. 차갑고, 출렁이고, 손가락을 적신다. 그 '젖는다'는 느낌, 그 흐른다는 성질이 어디서 오는지 따져 본 적 있나. 물은 산소 하나에 수소 둘이 붙은 알갱이다. 그런데 산소를 한 통 모아 봐라. 기체다. 수소를 한 통 모아 봐라. 역시 기체고, 불을 대면 펑 터진다. 둘 중 어디에도 젖음은 없다. 흐름도 없다. 그런데 이 둘을 붙여 놓으면, 난데없이 축축하고 미끄럽고 출렁이는 무언가가 나타난다. 분자 하나를 현미경으로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안에 '젖음'은 들어 있지 않다. 그건 알갱이 하나의 성질이 아니라, 알갱이가 떼로 모여 서로 밀고 당길 때 비로소 위층에서 솟아나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야기는, 부분을 다 뜯어봐도 끝내 안 나오는 이 '위층의 질서'를 사람이 어떻게 알아챘는가에 관한 거다.

이걸 처음 정색하고 따진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는 1843년 논리학 책에서 세상의 인과를 두 종류로 갈랐다. 한쪽은 힘을 더하면 결과도 그만큼 더해지는 얌전한 경우다. 수레를 두 사람이 밀면 한 사람이 밀 때의 꼭 두 배 힘이 실린다. 그런데 다른 한쪽이 있다. 둘을 합쳤더니 각각의 결과를 더한 것과는 영 딴판인, 질적으로 새것이 튀어나오는 경우. 밀은 그 대표를 화학에서 봤다. 수소와 산소를 합치면 두 기체의 성질을 더한 무언가가 아니라, 둘 어디에도 없던 물이 나온다는 것. 그는 이 얄궂은 종류를 '이질적으로 솟는' 결과라 불렀다. 이름은 투박했지만, 그가 가리킨 손가락 끝은 정확했다. 세상에는 더하기로 안 되는 자리가 있다는 것.

그 손가락 끝에 마침맞은 이름을 박은 사람은 한 세대 뒤의 조지 헨리 루이스다. 직업 철학자라기보단 비평가요 과학 애호가였고, 소설가 조지 엘리엇의 평생 동반자로 더 알려진 사람이다. 그가 1875년에 낸 책에서 두 단어를 갈라 세웠다. 부분의 성질을 그저 더하고 빼서 미리 계산해 낼 수 있는 결과를 그는 '합산되는 것'이라 했고, 아무리 부분을 계산해도 도무지 예측되지 않는, 질적으로 새로 돋는 결과를 '창발하는 것'이라 불렀다. 영어 '이머전스', 곧 떠올라 솟는다는 말이 생각의 도구로 못 박힌 순간이다. 그러니 기억해 둬라. 창발이라는 개념은 어느 천재가 무에서 발명한 게 아니라, 이미 다들 어렴풋이 느끼던 '합으로 안 되는 자리'에 밀이 윤곽을 그리고 루이스가 이름을 붙여 준, 발견에 가까운 명명이었다.

이름이 붙자 20세기 초 영국에서 한 무리의 철학자들이 이 발상에 올라탔다. 모건, 알렉산더, 브로드 같은 이들이 그랬다. 그들은 큰 꿈을 꿨다. 물질에서 생명이, 생명에서 마음이 한 층 한 층 솟아오른 게 우주의 역사이며, 위층의 질서는 아래층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다고. 멋진 그림이었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한 번 꺾인다. 화학과 물리학이 무섭게 발전하면서, 한때 '도저히 아래로 설명 못 한다'던 것들이 하나씩 아래로 설명되기 시작한 거다. 그러자 사람들은 비웃었다. 창발이란 결국 '우리가 아직 계산을 못 한다'는 무지의 다른 이름 아니냐고. 한동안 이 말은 게으른 신비주의의 딱지처럼 취급받으며 변방으로 밀려났다.

이 말을 변방에서 다시 끌어올린 사람은 뜻밖에도 물리학자였다. 필립 앤더슨. 고체 속 전자들이 떼로 굴 때 벌어지는 일을 파고든 사람으로, 훗날 노벨상을 받는다. 그가 1972년에 쓴 짧은 글의 제목이 모든 걸 압축한다. '많아지면 달라진다.' 그의 일격은 이거였다. 입자 하나의 법칙을 통째로 다 안다 해도, 입자가 수억 개 모이면 거기서 전혀 새로운 법칙이 위층에 생기고, 그건 아래 법칙에서 연역되지 않는다는 것. 물이 어는 것도, 자석에 갑자기 자성이 생기는 것도, 어떤 금속이 특정 온도 아래에서 전기 저항을 0으로 떨구는 일도, 알갱이 하나엔 없는 성질이 떼의 규모에서 솟는 사건이다. 앤더슨은 환원주의가 틀렸다고 한 게 아니다. 가장 밑바닥 법칙을 안다고 위층 세계가 저절로 따라 나오는 건 아니라고, 각 층은 그 층 고유의 법칙을 따로 가진다고 못 박은 거다. 그 한 편의 글로 창발은 신비주의의 딱지를 떼고 진지한 과학의 언어로 복권됐다.

그리고 이 관점이 가장 또렷하게 눈으로 보인 자리가 컴퓨터다. 수학자 존 콘웨이가 1970년 무렵 만든 '생명 게임'이라는 게 있다. 바둑판 같은 격자 위 칸들이 켜지고 꺼지는데, 규칙이라곤 딱 몇 줄뿐이다. 이웃이 너무 적으면 외로워 꺼지고, 너무 많으면 붐벼 꺼지고, 알맞으면 켜진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이 시시한 규칙만 깔고 기계를 돌리면,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격자 위로 스스로 기어 다니는 무늬, 끝없이 총알을 쏘아 대는 패턴, 심지어 다른 패턴을 낳는 패턴까지 솟아오른다. 규칙 어디에도 '기어간다'는 말은 없다. 그 움직임은 규칙의 합이 아니라, 규칙이 수많은 칸에 걸쳐 굴러갈 때 위층에 솟는 질서다. 바로 여기서 너는 가장 중요한 한 수를 배워야 한다. 이런 판에서는 시작 배치만 보고 결말을 미리 계산해 낼 지름길이 없다. 답을 알려면 그냥 끝까지 한 칸 한 칸 돌려 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컴퓨터로 창발을 다루려면 생각의 윗단추부터 갈아 끼워야 했다. '식을 풀어 답을 구한다'는 오랜 틀을 내려놓고, '규칙을 깔고 끝까지 굴려 무엇이 솟나 지켜본다'는 틀로 갈아타야 했던 것이다. 오늘날 새 떼의 군무를 흉내 내고, 도시의 교통을 통째로 시뮬레이션하고, 수많은 행위자를 풀어놓아 시장을 예측하는 일들이 죄다 이 갈아탄 틀 위에 서 있다.

그러니 너가 어떤 덩어리진 현상 앞에 섰을 때 — 시장이 갑자기 한 방향으로 쏠리든, 조직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든, 군중이 한 몸처럼 움직이든 — 그걸 자꾸 한 사람, 한 요인으로 쪼개 범인을 찾으려 들지 마라. 어떤 질서는 부분 어디에도 없고, 오직 부분들이 그만한 수로 얽혀 서로 밀고 당길 때 위층에서만 돋는다. 그럴 땐 알갱이를 더 잘게 부수지 말고, 한 층 올라서서 '이 떼가 모이니 무엇이 새로 솟았는가'를 통째로 봐라. 물의 젖음을 수소 분자 속에서 찾지 않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