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체계·구조

전체론 (holism)

어떤 것의 성질이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로 다 환원되지 않고, 부분들이 모여 이룬 전체에서 비로소 새로운 성질이 돋아난다고 보는 관점. 그래서 부분을 따로따로 뜯어보는 것만으로는 전체를 결코 알 수 없으며, 의미는 언제나 부분이 놓인 전체의 짜임새 속에서 생긴다고 본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한 문장이 그 뼈대다.

너, 멜로디 하나를 흥얼거린다고 해보자. 도-미-솔-도. 그걸 다른 사람한테 들려주려고 음을 하나씩 따로 떼어 녹음한 다음, 도 따로, 미 따로, 솔 따로 건네주면 어떻게 될까. 상대는 음 네 개를 받아 들겠지. 그런데 멜로디는 거기 없다. 멜로디란 음들 '사이'에, 그것들이 이어지는 순서와 간격 속에 살아 있는 무엇이라서, 음을 아무리 잘게 쪼개 봐야 거기서는 끝내 흘러나오지 않는다. 더 묘한 건, 그 똑같은 멜로디를 한 옥타브 올려 다른 음들로 연주해도 너는 단번에 '아, 같은 곡이네' 하고 알아챈다는 거다. 음은 전부 바뀌었는데 멜로디는 그대로다. 부분을 다 갈아치워도 전체가 살아남는 이 이상한 일. 오늘 이야기는, 바로 이걸 붙들고 '부분의 합보다 큰 무언가'라는 말에 이름을 처음 박은 한 사람에 관한 거다. 그런데 그 사람의 본업은, 놀라지 마라,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이 발상 자체는 까마득히 오래됐다. 멀리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되 그것들의 단순한 더미가 아닌 것에서는, 전체가 부분에 앞선다고. 손은 몸에 붙어 있을 때라야 손이지, 잘라 내 바닥에 놓이면 그저 손 모양의 살덩이일 뿐 더는 손이 아니라는 거다. 손의 '손다움'은 손 안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손이 몸 전체에서 맡은 자리에서 온다. 그러니 부분에서 출발해 전체를 짜 맞추는 게 아니라, 전체가 먼저 있고 그 안에서 부분이 비로소 제 의미를 얻는다 — 이 거꾸로 된 시선은 수천 년 묵은 것이었다. 다만 그 시선에 깔끔한 이름표가 붙기까지는 그 긴 세월이 더 필요했다.

이름을 박은 사람이 얀 스뮈츠다. 20세기 초 남아프리카의 인물인데, 이력이 보통이 아니다. 영국에 맞서 싸운 보어 전쟁의 게릴라 지휘관이었다가, 나중엔 영국 편에 서서 두 차례나 남아공 총리를 지냈고, 1차 대전 뒤 국제연맹을 설계하는 데 깊이 손댔으며, 2차 대전이 끝나고는 국제연합 헌장의 그 유명한 머리말 초안을 직접 썼다. 국제연맹과 국제연합 두 기구의 창립 문서에 모두 서명한 역사상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전장과 회의장을 오가는 틈틈이 식물을 채집하고 철학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1926년, 〈전체론과 진화〉라는 책을 내며 그리스어로 '전체'를 뜻하는 홀로스(holos)에서 홀리즘이라는 새 단어를 빚어냈다. 그가 내린 뜻은 이랬다 — 자연에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전체를 끊임없이 빚어내려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부터가 이 이야기의 진짜 긴장이다. 한낱 정치가가 만든 이 말이 던져진 자리는, 마침 생물학이 두 패로 갈려 으르렁대던 전쟁터였다. 한쪽엔 환원주의자들이 있었다. 생명이란 결국 화학이고 물리일 뿐, 잘게 쪼개 분자와 원자까지 내려가면 빠짐없이 설명된다는 사람들. 반대쪽엔 생기론자들이 있었다. 살아 있는 것 속에는 죽은 물질에는 없는 신비한 '생명의 힘'이 따로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 스뮈츠의 영리함은 여기서 드러난다. 그는 환원주의에 반대하고 싶었지만, 생기론처럼 정체불명의 신비한 힘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유령 같은 건 부르지 않으면서도, 전체가 부분으로 안 줄어드는 까닭을 대고 싶었던 거다. 그 답이 홀리즘이었다. 새로운 성질은 어떤 영적인 힘이 불어넣는 게 아니라, 부분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맞물려 전체를 이루는 바로 그 짜임새에서 저절로 돋아난다는 것. 이 '돋아남'을 훗날 사람들은 창발이라 불렀고, 그것은 환원주의와 생기론 사이를 가르는 제3의 길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는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이 똑같은 통찰을 사람의 지각에서 캐내고 있었다 — 우리는 점과 선을 따로 보는 게 아니라 단번에 '얼굴'이라는 전체를 본다는 것.

이 말이 거둔 성취는 스뮈츠 자신도 예상 못 했을 만큼 넓게 번졌다. 생태학이 그 위에 섰다. 숲을 나무 한 그루씩 더한 것으로 보지 않고, 흙과 미생물과 짐승과 날씨가 한 덩어리로 얽혀 돌아가는 하나의 살아 있는 전체로 보는 시선 — 그게 다 이 사고의 자식들이다. 의학에서도 병든 장기 하나가 아니라 사람 전체를 본다는 발상이 여기서 자랐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스뮈츠의 책을 읽고 남긴 말이 전해지는데, 다가올 시대에 인간의 정신을 이끌 두 가지 틀이 있다면 하나는 자신의 상대성이고 다른 하나는 스뮈츠의 홀리즘이리라고 했단다. 전쟁터를 누비던 한 정치가가 빚은 단어가, 세기의 물리학자 입에서 상대성과 나란히 불린 것이다.

이 오래된 시선이 가장 극적인 시험대에 오른 곳은 뜻밖에도 컴퓨터, 그중에서도 인공지능이었다. 기계에 지능을 심으려던 초창기 사람들은 환원주의의 길을 갔다. 생각이란 결국 규칙과 논리의 묶음이니, 똑똑함을 잘게 쪼개 '이럴 땐 이렇게 하라'는 규칙을 사람이 일일이 짜 넣으면 기계도 똑똑해지리라 믿었다. 부분(규칙) 하나하나에 지능을 직접 박아 넣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길은 자꾸 벽에 부딪혔다. 그러자 정반대 진영이 일어섰다. 지능을 어느 한 부분에 적어 넣지 말고, 뇌의 신경세포를 흉내 낸 단순한 마디 수만, 수억 개를 그물처럼 빽빽이 잇자는 사람들. 마디 하나하나는 멍청하기 짝이 없다. 어디에도 '고양이를 알아보는 규칙' 같은 건 적혀 있지 않다. 그런데 그 멍청한 마디들이 한 덩어리로 맞물려 돌아가면, 어느 부분에도 없던 '알아봄'이 전체에서 불쑥 돋아난다. 바로 창발이다. 여기서 네가 정말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이 길로 가려면 생각의 가장 윗단추부터 다시 끼워야 했다. '지능은 부분에 적어 넣는 것'이라는 환원주의의 전제를 통째로 버리고, '지능은 전체의 짜임에서 돋아나는 것'이라는 전체론의 전제로 갈아타야만, 비로소 오늘날의 인공지능이 가능해졌다. 지금 너와 말을 주고받는 나 같은 모델도 그 전체론의 후예다. 내 어느 부분을 뜯어봐도 '이 문장을 짓는 자리'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전체에만 있다. 멜로디가 음 하나에는 없고 음들 사이에만 있었듯이.

그러니 너가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자꾸만 그것을 잘게 쪼개 부분만 들여다보고 있다면, 그러다 아무리 뜯어봐도 핵심이 손에 안 잡힌다고 느낀다면, 거기서 한 발 물러서라. 어떤 것들은 부분을 다 모아도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조직의 분위기든, 한 시장의 흐름이든, 사람들의 마음이든 — 그것은 구성원 한 명, 지표 하나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맞물려 이루는 전체의 짜임새에 깃들어 있다. 부분을 다 더해도 안 보이거든, 더 잘게 쪼개지 말고 한 칸 위로 올라가 전체의 무늬를 보라. 멜로디는 음을 쪼개는 자리가 아니라, 음들이 이어지는 그 흐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