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단논법 (syllogism)
두 개의 전제에서 하나의 결론을 필연적으로 끌어내는 추론의 형식. 모두에게 참인 큰 명제(대전제)와 그 아래 놓인 작은 명제(소전제)를 맞물리면, 결론은 우리가 좋든 싫든 따라 나온다. 내용이 아니라 명제들이 맞물리는 '꼴' 자체가 참을 보증한다는 발상이 핵심이다.
너, 누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보자.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니 소크라테스도 죽는다.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지. 그런데 잠깐, 너는 소크라테스가 죽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가 죽는 장면을 본 적도 없고, 세상 모든 사람을 일일이 확인해 본 적도 없잖아. 그런데도 너는 이게 틀릴 리 없다고 확신한다. 마치 1 더하기 1이 2인 것만큼이나. 바로 이 이상한 확신 — 새로 보거나 겪지 않았는데도 거역할 수 없이 참인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이 일 — 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붙들어 분해한 사람의 이야기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 한 청년이 있었다. 플라톤의 제자였고 나중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정교사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다. 그가 던진 물음은 묘했다. 사람들이 옳게 따지든 틀리게 따지든, 그 '따짐' 자체의 뼈대를 떼어 내 들여다볼 수 있을까. 무엇에 관해 따지느냐 — 신이든 물고기든 정치든 — 와 상관없이, 올바른 추론이라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형태가 있지 않을까. 그는 이 형태를 끄집어내려고 명제에서 내용을 통째로 비워 버리는 과감한 짓을 한다. '소크라테스'와 '사람' 대신 그냥 A와 B를 집어넣은 거다. 모든 B는 C다, 모든 A는 B다, 그러므로 모든 A는 C다. 인류가 추론에 처음으로 대수의 빈 그릇을 들이댄 순간이었다. 그는 이걸 자기 책 '분석론 전서'에 적었고, 어떤 명제들이 맞물려야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지를 거의 빠짐없이 분류해 냈다. 여기서 핵심은 이거다. 결론이 참인 건 소크라테스에 관해 무슨 특별한 걸 알아서가 아니라, 명제들이 맞물린 '꼴'이 그걸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어떤 것들이 놓이면 그것들과 다른 무언가가 그것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미끄러진다. 형태가 보증하는 건 '전제가 참이면 결론도 참'이라는 연결뿐이지, 전제 자체가 참인지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는다. 게다가 멀쩡해 보이는 꼴이 사실은 함정인 경우가 있다. 끝까지 한번 따라와 봐라. 모든 개는 동물이다. 모든 고양이는 동물이다. 그러니 모든 개는 고양이다. 어디서 무너졌지? 두 전제 다 멀쩡한 참인데 결론은 명백한 거짓이다. 비밀은 둘을 이어 주는 다리에 있다. 개와 고양이를 묶어 줄 공통의 끈은 '동물'인데, 이 '동물'이라는 말이 두 전제에서 한 번도 '모든 동물'로 펼쳐진 적이 없다. 개는 동물 무리의 한 귀퉁이, 고양이는 또 다른 귀퉁이일 뿐, 둘이 같은 칸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다. 중간을 잇는 그 항이 적어도 한 번은 '전부'를 끌어안아야 두 끝이 비로소 한 줄에 꿰인다 — 뒷날 논리학자들이 중명사 부주연의 오류라 부른 이 결함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는 이미 잡아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도구의 진짜 쓸모는, 옳은 추론을 만들어 주는 데 있다기보다 그럴듯하지만 틀린 추론을 솎아내는 그물에 있다.
이 그물이 얼마나 촘촘했던지, 그 뒤로 거의 이천 년 동안 사람들은 여기에 한 줄도 보태지 못했다. 중세 수도원의 학자들은 이걸 외우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들은 유효한 형태 하나하나에 라틴어 이름을 붙였는데 — 바르바라, 켈라렌트, 다리이, 페리오 같은 — 그 이름에 박힌 모음들이 곧 그 추론을 이루는 명제들의 종류를 알려 주는 암호였다. 노래처럼 외우면 어떤 짜임이 참이고 어떤 게 함정인지 손가락으로 짚어 낼 수 있었다. 근대에 와서 칸트조차,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고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인다고 적었을 정도다. 한 청년이 빈 그릇에 A와 B를 넣어 본 그 발상이, 서양이 '올바로 생각한다'는 게 무엇인지 재던 자가 되어 이천 년을 버틴 것이다.
그 견고한 성벽에 마침내 금이 간 건 19세기 끝자락, 그리고 진짜 반전은 기계 앞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이 형태 논리를 기계에 넣어 자동으로 증명을 시키고 싶어 했다. 그런데 막상 해 보니 아리스토텔레스의 틀이 너무 좁았다. '모든 A는 B'처럼 한 덩어리에 한 덩어리를 포개는 것까진 되는데, '모든 사람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처럼 관계가 얽히고 '모든'과 '어떤'이 뒤섞이는 문장 앞에서는 이천 년의 그물이 맥을 못 췄다. 결국 프레게라는 독일 수학자가 명제를 통째로 뜯어고쳐, 술어와 양화사라는 더 깊은 부품으로 다시 짠 뒤에야 길이 열렸다. 그리고 1965년, 존 앨런 로빈슨이 이 새 논리를 기계가 단 하나의 규칙으로 돌릴 수 있게 갈아 낸 '분해 원리'를 내놓는다. 오늘날 컴퓨터가 정리를 증명하고, 프롤로그 같은 언어가 '사실'들로부터 결론을 자동으로 길어 올리는 일의 밑바닥이 바로 그거다. 여기서 네가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기계가 삼단논법을 물려받으려면, 계산이 빨라지는 것만으론 안 됐다. '추론의 단위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의 가장 윗단추부터 다시 끼워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통명제를 통째로 다루던 자리를, 더 잘게 쪼갠 술어와 양화사로 바꿔 끼우고 나서야 비로소 기계가 따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너가 누군가의 매끄러운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혹은 네 머릿속에서 결론 하나가 너무 술술 굴러 나오는 순간을 만나거든, 두 가지를 따로 떼어 물어라. 전제들은 정말 참인가, 그리고 그 전제들이 정말 이 결론을 강제하는가. 그럴듯함은 둘 중 어느 하나만 충족해도 생겨난다. 하지만 참은, 둘이 동시에 맞물려야만 비로소 너의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