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사실추론 (counterfactual)
'만약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어떤 원인이 정말로 그 결과를 낳았는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추론법. 실제로 벌어진 사실(factual) 대신 벌어지지 않은 가정(counterfactual)을 머릿속에 세워 둘을 견주는 것이 핵심이며, 인과와 책임을 따지는 거의 모든 판단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너, 아침에 1분만 일찍 집을 나섰으면 그 버스를 탔을 텐데, 하고 발을 동동 구른 적 있을 거다. 혹은 그때 그 사람한테 연락만 했더라면, 하고 잠 못 드는 밤도. 가만 보면 이상한 일이다. 1분 일찍 나선 아침은 이 세상에 없었고, 연락한 너도 실제로는 없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너는 지금 또렷하게 머릿속에 그리고, 그 그림자 세계와 진짜 세계를 나란히 놓고 따져 보고 있다. 동물은 못 하고 사람만 한다는 이 기묘한 재주가 오늘 이야기다. 그리고 이 너무 흔해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버릇이, 법정에서 사람의 운명을 가르고 끝내 기계 지능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시작은 뜻밖에도 무심한 한 줄이었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1748년에 원인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면서, 먼저 익숙한 말을 한다. 원인이란 늘 결과를 앞서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빵을 놓으면 늘 누가 집어 가더라, 하는 식의 '항상 같이 다니더라'는 정의지. 그런데 그는 곧바로 '다시 말하면' 하고 묘한 한마디를 덧붙인다. 만약 첫 번째 것이 없었더라면 두 번째 것도 결코 없었으리라. 흄 자신은 이 뒷말을 별것 아닌 동어반복쯤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쳤다. 베이즈가 깨달음을 서랍에 넣고 잊은 것처럼, 흄도 자기가 인과의 진짜 심장을 건드려 놓고는 모른 채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그 한 줄에 씨앗이 들어 있었다. 원인이냐 아니냐를 알고 싶으면, 그게 없는 세상을 상상해서 결과도 같이 사라지는지 보라는 것.
이 무심한 한 줄이 가장 매섭게 칼이 된 곳은 철학 강단이 아니라 법정이었다. 누가 죽었다, 그게 네 탓이냐. 이걸 판가름하려고 법은 오래전부터 한 가지 시험을 써 왔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시험, 영어로 but-for test라 부르는 거다. 피고가 그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피해가 그래도 일어났겠는가? 안 일어났겠다면 피고가 원인이다. 일어났을 거라면 피고 탓이 아니다. 깔끔하지. 운전자가 신호를 안 지켰다, 그가 신호만 지켰더라면 사람이 안 죽었겠는가, 그렇다면 책임이다. 수백 년간 인과와 책임을 가르는 이 저울이 바로 흄의 그 가정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비틀린다. 이 깔끔한 저울이 어느 지점에서 보란 듯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끝까지 따라가 볼 만한 예제가 하나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모른 채, 같은 사람을 같은 순간에 쏘았다고 해보자. 둘 다 심장을 꿰뚫었고, 어느 한 발만으로도 즉사였다. 자, '그것이 없었더라면' 시험을 첫 번째 총잡이에게 들이대 보자. 그가 안 쏘았더라면 피해자가 살았겠는가? 아니다. 두 번째 총알이 어차피 죽였을 테니까. 그러니 첫 번째는 원인이 아니다. 그럼 두 번째에게 물어도 똑같다. 그도 안 쏘았어도 첫 번째 총알이 죽였을 테니, 그도 원인이 아니다. 결론이 미쳤다. 둘 다 쏘아 죽였는데, 따져 보니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원인이 둘로 넘쳐서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어 버린 거다. 이걸 과잉결정이라 부른다. 한 줄짜리 가정문이 이 지점에서 헛발질을 한다는 게 드러난 순간, 이 사고법은 더 깊어져야만 했다.
이 헝클어진 실타래를 가장 정교하게 푼 사람이 20세기 미국 철학자 데이비드 루이스였다. 그는 1973년 책에서 흄의 가정문에 정밀한 기계장치를 달았다. 핵심 발상은 '가능세계'다. 일이 다르게 풀린 세상들이 무수히 있다고 치고, 그중 우리 현실과 가장 닮은, 가장 가까운 세상을 떠올려라. 원인이 사라진 그 가장 가까운 세상에서 결과도 같이 사라지면, 그게 인과다. 막연히 '안 그랬으면'이 아니라 '현실과 딱 한 군데만 다른 가장 가까운 그림자 세상에서'라고 못 박은 것. 이 정밀함 덕에 흄이 서랍에 넣어 둔 한 줄은 비로소 철학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왔고, 과잉결정 같은 골치 아픈 경우들까지 다루는 정교한 논의로 이백 년 만에 만개했다.
목사의 산수가 그랬듯, 철학자의 가정문이 왕좌에 오른 마지막 반전도 컴퓨터였다. 이스라엘 출신의 컴퓨터 과학자 주디아 펄이 그 다리를 놓았다. 그는 인과를 다루는 능력에 세 칸짜리 사다리가 있다고 했다. 맨 아래 칸은 '봄'이다. 그저 같이 일어나는 것들을 관찰하는 것 — 수탉이 울면 해가 뜨더라, 하는 상관관계. 오늘날 거의 모든 기계학습이 사실 이 맨 아래 칸에 머문다. 가운데 칸은 '함'이다. 직접 손을 대 바꿔 보는 것. 그리고 맨 꼭대기 칸이 바로 '상상함', 곧 반사실추론이다.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를 따지는 것. 펄은 이 꼭대기 칸이 인간 지능의 정점이자, 기계가 가장 오르기 어려운 봉우리라고 못 박았다.
여기서 네가 꼭 붙들어야 할 대목이 있다. 펄이 거듭 외친 건, 아무리 데이터를 쌓아 올려도 맨 아래 칸에서는 결코 꼭대기 칸으로 못 올라간다는 거다. '같이 일어나더라'는 관찰을 산더미로 쌓아도, '안 그랬으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의 답은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려면 세상이 무엇으로 무엇을 일으키는지를 그린 인과의 모형, 그 윗단추가 따로 있어야 한다. 기계에게 반사실을 추론시키려면, 데이터만 더 먹이면 똑똑해진다는 통념의 가장 윗단추부터 갈아 끼워야 했던 것이다. 흄이 무심코 흘린 그림자 세계가, 생각의 상위 틀이 통째로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기계 지능의 꼭대기 칸으로 올라앉았다.
그러니 너가 '이게 효과가 있었나', '이게 저 일의 진짜 원인인가', '이건 누구 책임인가'를 따져야 하는 순간을 만나거든, 실제로 벌어진 일만 노려보지 마라. 그 옆에 벌어지지 않은 세상을 하나 세워라. 그게 없었더라도 결과가 똑같았을까. 똑같았다면 그건 원인도 공도 아니다. 달라졌어야 비로소 진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또렷이 그려 내는 그 재주가, 흔해 빠진 후회처럼 보여도 실은 인과를 꿰뚫는 가장 깊은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