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추론 (modus ponens / tollens)
만약 P이면 Q이다라는 조건문을 발판 삼아 결론을 끌어내는 추론의 두 기본형. P가 참임을 확인해 Q를 얻는 것이 긍정식(modus ponens), Q가 거짓임을 확인해 P도 거짓이라 결론짓는 것이 부정식(modus tollens)이다. 고대 스토아 학파가 증명이 필요 없는 가장 기본적인 논증으로 꼽았다.
너, 사냥개 한 마리가 짐승의 자취를 쫓는 장면을 떠올려 봐라. 한참을 달리다 길이 셋으로 갈라지는 곳에서 그만 냄새를 놓친다. 개는 멈칫하더니 첫째 길에 코를 박고 킁킁댄다. 냄새가 없다. 둘째 길도 킁킁. 역시 없다. 그런데 개는 셋째 길은 냄새도 맡지 않고 그냥 내달린다. 자, 여기서 그 개가 한 일을 천천히 들여다봐라. '짐승은 셋 중 하나로 갔다. 첫째도 아니고 둘째도 아니다. 그러니 따져 볼 것도 없이 셋째다.' 개는 짖지도 못하는데, 머릿속에서 가능성 하나하나를 지워 마지막 답을 길어 올렸다. 오늘 이야기는, 짐승도 아니고 사람의 가장 흔한 생각 하나에 처음으로 골격을 세운 어떤 학파에 관한 거다.
이 사냥개 이야기를 굳이 글로 남긴 사람이 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그리스의 철학자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파를 사실상 다시 세웠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가 개를 끌어들인 건 동물이 똑똑하다는 걸 자랑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는 추론이라는 것의 가장 밑바닥 골조를 보여 주고 싶었던 거다. 그보다 앞선 아리스토텔레스도 논리를 세우긴 했는데, 그쪽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죽는다'처럼 사물의 분류를 따지는 방식이었다. 스토아 사람들은 결이 다른 데를 팠다. 그들은 통째로 참이거나 거짓인 '문장'들이 만약이면이다, 이거나이다 같은 이음매로 어떻게 엮이는지를 파고들었다. 오늘날 논리학자들이 명제논리라 부르는 그 분야의 첫 삽을, 이 스토아 사람들이 떴다.
크리시포스는 더 나아가, 증명이라는 게 결국 몇 안 되는 뻔한 발판들 위에서 굴러간다고 봤다. 너무 당연해서 따로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논증, 그가 '증명 불요(不要)'라 부른 기본형을 그는 딱 다섯 개로 추렸다. 그 다섯 중 맨 앞 둘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하나는 '만약 P이면 Q이다, 그런데 P이다, 그러므로 Q이다' — 발판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긍정식. 다른 하나는 '만약 P이면 Q이다, 그런데 Q가 아니다, 그러므로 P도 아니다' — 결과가 어긋난 걸 보고 원인을 거꾸로 지워 내는 부정식. 아까 그 개가 부린 재주, 가능성을 하나씩 지워 마지막을 건진 그 솜씨가 바로 이 부정식의 친척뻘이다. 훗날 라틴어로 modus ponens, modus tollens라는 이름이 붙어 지금까지 그대로 쓰인다.
여기서 너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 정도야 누구나 하는 거 아닌가. 앞쪽 긍정식은 정말 그렇다. 비가 오면 길이 젖는다, 지금 비가 온다, 그러니 길이 젖었겠지 — 이건 세 살배기도 한다. 그런데 뒤쪽 부정식, 결과를 부정해 원인을 지우는 일에서 사람은 놀랄 만큼 자주 무너진다. 이걸 실험으로 까발린 사람이 1966년의 심리학자 피터 워슨이다. 그가 낸 문제는 이렇다. 책상에 카드 넉 장이 놓여 있다. 보이는 면이 각각 3, 8, 파랑, 빨강이다. 카드마다 한 면엔 숫자, 반대 면엔 색이 칠해져 있다. 규칙은 하나, '한 면이 짝수면 반대 면은 파랑이다.' 이 규칙이 참인지 확인하려면 어느 카드를 뒤집어 봐야 하나.
대부분은 자신 있게 8과 파랑을 고른다. 그런데 이게 틀렸다. 정답은 8과 빨강이다. 8을 뒤집는 건 맞다. 짝수니까 뒤가 파랑이어야 하고 아니면 규칙이 깨지니까 — 이건 긍정식이다. 문제는 빨강이다. 빨강 뒤에 만에 하나 짝수가 숨어 있으면 '짝수인데 파랑이 아닌' 반례가 되어 규칙이 무너진다. 그러니 빨강을 반드시 까 봐야 한다. 이게 바로 부정식이다. 결과(파랑)가 아닌 걸 붙들고 원인(짝수)을 솎아 내는 일. 반대로 파랑 카드는 뒤집어 봐야 아무 쓸모가 없다. 규칙은 짝수가 파랑이라 했지, 파랑이면 짝수라고는 한 적이 없으니까. 워슨의 실험에서 이 답을 맞힌 사람은 열에 하나도 안 됐다. 인류가 이천 년 전부터 다섯 발판 중 하나로 떠받들어 온 추론을, 정작 머릿속에서는 이토록 헛디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통쾌한 반전이 있다. 똑같은 논리 구조를 옷만 갈아입혀 내놓으면 사람들이 갑자기 척척 풀어낸다. 1990년대 초 진화심리학자 레다 코스미디스와 존 투비가 보인 게 그거다. 카드를 이렇게 바꿔 보자. 술집 규칙 '술을 마시려면 만 18세가 넘어야 한다', 그리고 카드 넉 장은 각각 '맥주 마시는 손님', '콜라 마시는 손님', '16세', '25세'. 누구를 확인해야 규칙 위반을 잡아내나. 이번엔 거의 모두가 단숨에 맞힌다. 맥주 마시는 사람의 나이를 봐야 하고, 16세가 뭘 마시는지 봐야 한다 — 빨강 카드를 까야 했던 그 부정식을, 술집 얘기로 바꾸니 너도 나도 자동으로 해낸다. 똑같은 modus tollens인데 말이다. 사람의 머리는 메마른 기호 P, Q 앞에선 비틀거려도, 누가 규칙을 어겼나 같은 구체적 상황 앞에선 귀신같이 작동하더라는 것. 추론의 골격은 같아도 그 골격에 피가 도는 건 맥락이 입혀질 때다.
스토아 사람들이 깐 이 발판이 이천 년을 건너 진짜 왕좌에 오른 건 기계 앞에서였다. 19세기에 프레게와 불 같은 이들이 명제논리를 빈틈없는 수학으로 벼려 놓자, 그게 고스란히 컴퓨터의 뼈대가 됐다. 네 손안의 기계 속 회로는 결국 '입력이 이러이러하면 출력은 저러하다'는 조건의 그물이고, 이게 전류로 구현된 게 논리 게이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의 추론을 흉내 내겠다고 만든 초기 인공지능은 아예 '만약이면이다' 규칙 수천 개를 쌓아 두고, 사실 하나가 들어올 때마다 긍정식을 미친 듯이 연쇄해 결론을 뽑아내는 방식이었다. 의사의 진단을 돕던 초기 전문가 시스템이며, 프롤로그라는 언어가 다 그 핏줄이다. 크리시포스가 손으로 한 번 디뎠을 그 발판을, 기계는 일 초에 수백만 번씩 디딘다.
여기서 네가 놓치면 안 될 대목이 있다. 기계가 이걸 해내려면, 사람이 일상에서 쓰는 헐렁한 '만약~이면'을 그대로 쓸 수가 없었다. 일상의 조건문엔 속뜻과 인과와 예외가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는데, 기계는 그런 끈끈이를 못 먹는다. 그래서 조건문을 'P가 참인데 Q가 거짓인 경우만 거짓이고 나머진 전부 참'이라는, 인간 직관과는 사뭇 어긋나는 메마른 약속으로 다시 못박아야 했다. 생각의 윗단추부터, '만약이란 대체 무슨 뜻인가'를 통째로 갈아 끼우고 나서야 비로소 기계가 추론을 굴릴 수 있었던 거다. 너무 당연해서 증명조차 필요 없다던 발판이, 기계에게 넘어가려니 그 밑바닥 정의부터 새로 깎여야 했다는 얘기다.
그러니 너가 어떤 주장이나 가설을 손에 쥐었을 때, 두 방향으로 발을 디뎌 봐라. 한쪽은 앞으로. '이게 참이라면, 그렇다면 무엇이 반드시 따라 나와야 하지?' 그 따라 나올 것이 실제로 보이면 네 주장은 한 걸음 단단해진다. 다른 한쪽은 거꾸로. '이게 참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결과가, 지금 안 보이는 건 아닌가?' 워슨의 빨강 카드처럼, 사람이 본능적으로 까 보길 꺼리는 바로 그 자리 — 내 믿음이 틀렸다면 깨질 그 자리를 일부러 뒤집어 보는 것. 앞으로 밀어 확인하고 뒤로 당겨 반증하라. 그게 짖지도 못하는 사냥개조차 부릴 줄 알았던, 추론의 가장 오래된 두 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