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역 (deduction)
참이라고 받아들인 전제들에서 논리의 힘만으로 강제되는 결론을 끌어내는 추론법. 전제가 모두 참이고 형식이 타당하면 결론은 반드시 참이 되며,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전제 안에 이미 숨어 있던 진리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핵심이다.
너, 탐정 이야기를 한 편쯤은 봤을 거다. 방문은 안에서 잠겼고 창에는 빗장이 걸려 있다. 명탐정이 말한다. 범인이 굴뚝으로 빠져나갔을 리 없고 마룻바닥에 비밀문도 없으니, 남은 길은 하나뿐이라고. 그 순간 너는 무릎을 친다. 그가 새 단서를 캐낸 게 아니다. 이미 방 안에 다 있던 사실들을 모아 놓고, 그 사실이 참이라면 결론은 이것 말고 있을 수가 없다고 못을 박은 것뿐이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 전제를 인정한 이상 결론을 거부할 도리가 없는 그 옴짝달싹 못 하는 느낌. 오늘 이야기는 인류가 이 느낌에 처음으로 규칙을 붙이고, 그걸 너무 믿은 나머지 이천 년을 한 문제에 갈려 나간 사연이다.
규칙을 처음 손에 쥔 사람은 대략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사람들이 말다툼할 때 어떤 말 이음새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고 어떤 이음새는 그럴듯해 보여도 새는지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 단단한 이음새의 뼈대만 추려 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와 '사람'과 '죽는다'를 무엇으로 바꿔 끼우든, 앞의 두 줄을 인정하면 셋째 줄은 무조건 따라 나온다. 그는 이 강제의 형식을 삼단논법이라 불렀다. 중요한 건 그가 진리를 발견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진리가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새지 않고 옮겨 가는 통로'를 발견했다. 이게 연역이다. 전제에 든 진리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결론까지 운반하는 기술.
이 운반 기술을 가장 웅장하게 써먹은 사람은 그 뒤를 이은 유클리드였다. 그는 더없이 뻔해서 누구도 토 달 수 없는 몇 마디 — 점과 점은 직선으로 이을 수 있다 같은 — 다섯 개를 바닥에 깔고, 거기서 오직 연역만으로 기하학의 정리 수백 개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바닥 다섯 개가 참이라면 그 위에 올린 모든 것이 참임을 거부할 수 없다. 이 책 '원론'은 그 뒤 이천 년 동안 인간이 만든 가장 완벽한 생각의 건축물로 군림했다. 그런데 바로 이 완벽함 속에 가시가 하나 박혀 있었다.
그 다섯 바닥 중 다섯째가 영 거슬렸다. 한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면서 그 직선과 영원히 만나지 않는 평행선은 딱 하나뿐이다 — 대충 이런 내용인데, 나머지 넷이 한 줄짜리로 자명한 데 비해 이놈만 길고 복잡했다. 사람들은 의심했다. 이건 바닥에 깔 공리가 아니라, 앞의 넷에서 연역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결론 아닐까? 그렇다면 끌어내 보이면 된다. 여기서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길고 가장 집요한 헛수고가 시작된다. 내로라하는 수학자들이 이천 년에 걸쳐 다섯째 평행선 공리를 앞의 넷에서 연역해 내려고 달려들었고, 전부 실패했다. 누군가 성공했다 싶으면 어김없이 증명 어딘가에 평행선 공리를 슬쩍 다른 말로 바꿔 몰래 집어넣은 자기기만이 들통났다.
이 비극의 절정에 1733년 이탈리아의 예수회 신부 조반니 사케리가 있다. 그는 영리한 우회로를 택했다. 평행선 공리가 거짓이라고 일부러 가정한 다음, 그 가정에서 연역을 밀어붙여 말도 안 되는 모순이 터져 나오게 만들면, 결국 공리는 참일 수밖에 없다고 못 박는 작전이었다. 탐정이 다른 모든 출구를 막아 단 하나만 남기는 그 수법 그대로다. 그는 '유클리드, 모든 흠에서 풀려나다'라는 제목까지 미리 붙여 놓고 연역을 밀고 나갔다. 그런데 정리가 줄줄이 쏟아지는데 어디에서도 모순이 터지지 않았다. 멀쩡했다. 기괴하지만 앞뒤가 딱딱 맞는 또 하나의 기하학이 그의 펜 끝에서 통째로 자라나고 있었다. 사케리는 끝내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지막 장에서 있지도 않은 모순을 봤다고 우기며 책을 닫았다. 자기가 새 세계의 문을 열어 놓고도 그게 문인 줄 몰랐던 거다. 그의 책은 그대로 묻혔다가 백오십 년쯤 뒤에야 다시 발굴된다.
매듭은 19세기에 와서야 풀렸다. 러시아의 로바쳅스키가 1829년에, 헝가리의 청년 보여이 야노시가 1832년에, 서로의 존재도 모른 채 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평행선 공리는 앞의 넷에서 연역되지 않는다. 그것을 부정해도 모순은커녕 완전히 멀쩡한 또 다른 기하학이 선다. 이천 년의 헛수고는 풀 수 없는 문제를 풀려던 게 아니라, 애초에 풀 거리가 아닌 걸 풀려던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 가우스도 같은 결론에 일찌감치 닿았지만, 세상의 조롱이 두려워 서랍에 묻어 두었다고 전해진다. 보여이의 아버지가 아들의 발견을 보여 주자 가우스가 차마 칭찬을 못 한 건, 그걸 칭찬하면 평생 입 다물어 온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꼴이 되어서였다.
여기서 네가 평생 가져갈 교훈이 나온다. 연역은 진리를 만들지 못한다. 오직 옮길 뿐이다. 그래서 연역은 정직하고 동시에 무력하다. 바닥에 깐 전제가 참이면 결론까지 진리가 한 방울도 안 새고 도착하지만, 바닥이 틀리면 그 위에 아무리 흠 없이 쌓아 올려도 완벽하게 틀린 결론에 완벽하게 가닿을 뿐이다. 이천 년 동안 수학자들이 헛돈 진짜 이유도 결국 전제 하나를 잘못 의심한 데 있었다.
그리고 연역에는 다른 사고법엔 없는 마지막 반전이 있다. 이 운반 기술은 인류가 통째로 기계에 넘긴 유일한 생각이다. 19세기에 영국의 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의 규칙을 참과 거짓, 즉 1과 0의 대수 계산으로 갈아 끼웠고, 뒤이어 프레게가 그걸 빈틈없는 기호 체계로 벼렸다. 여기서 정말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추론을 기계에 넘기려면 생각의 가장 윗단추부터 다시 끼워야 했다. '생각한다'는 걸 의미를 음미하는 일이 아니라, 뜻을 깡그리 비운 기호를 정해진 규칙대로 밀어 옮기는 순수한 손놀림으로 다시 정의해야 했던 거다. 의미를 버리고 형식만 남기자, 비로소 사람 머리 없이도 전제에서 결론으로 가는 운반이 돌아갔다. 네 손안의 컴퓨터는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아무것도 새로 깨닫지 못하지만, 깔아 준 전제에서 강제되는 결론만큼은 한 치도 안 틀리고 토해 내는 거대한 연역 기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 의미를 벗고 회로 속으로 들어앉은 셈이다.
그러니 너가 누군가의 빈틈없어 보이는 결론 앞에서 압도당하거든, 논리의 사슬을 한 칸씩 따라가며 흠을 찾느라 진을 빼지 마라. 사슬이 단단할수록 오히려 맨 밑으로 내려가 바닥에 깔린 전제를 손가락으로 짚어라. 이 전제, 정말 참인가. 연역은 바닥이 썩어 있어도 천장까지 흠 없이 쌓인다. 결론을 의심하려거든 논증이 아니라 그 논증이 딛고 선 땅을 의심하는 것. 그게 이천 년 헛수고가 인류에게 남긴 단 한 줄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