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의사결정·판단

기회비용 사고 (opportunity cost)

어떤 것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의 진짜 값을, 그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차선의 가치로 재는 사고법. 무언가를 얻기 위해 치른 대가는 지갑에서 나간 돈만이 아니라, 같은 자원으로 누렸을 수도 있었던 가장 좋은 다른 길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경제학에서 비용이라는 말의 의미 자체를 바꿔 놓은 개념이다.

너, 토요일 오후가 통째로 비었다고 해보자. 친구가 공짜 영화표 한 장을 줬다. 돈 한 푼 안 든 표니까 이 영화는 공짜라고, 너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그 두 시간 동안 너는 밀린 잠을 잘 수도, 며칠째 미루던 글을 끝낼 수도, 오랜만에 연락 온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다. 표값이 0원이어도 그 영화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너는 그 두 시간으로 누렸을 수도 있었던 가장 좋은 무언가를, 영화관 의자에 앉는 대가로 고스란히 버린 거다. 값이라는 건 지갑에서 나가는 것만이 아니다. 손에 쥐려고 손에서 놓아야 했던 것, 그게 진짜 값이다. 오늘 이야기는 이 당연해 보이는 진실이, 사실은 사람 눈에 거의 보이지 않아서, 그걸 보이게 만든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것에 관한 거다.

먼저 깨진 유리창 하나에서 시작하자. 때는 1850년 여름 파리, 프레데리크 바스티아라는 프랑스 사람이 폐결핵으로 시들어 가며 마지막 글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가 든 장면은 이렇다. 가게 주인의 부주의한 아들이 유리창을 깬다. 여섯 프랑짜리다.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묘한 위로를 건넨다. 잘된 일 아니냐고. 저 깨진 유리 덕에 유리장수가 여섯 프랑을 벌고, 그 돈으로 또 다른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그렇게 돈이 돌아 마을이 살아난다고. 멀쩡한 유리를 깨는 게 경제에 보탬이 된다는 그럴듯한 소리. 바스티아는 여기서 칼을 든다. 너희가 본 건 유리장수가 번 여섯 프랑, 그 눈에 보이는 것뿐이다. 그런데 너희가 못 본 게 있다. 만약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면 가게 주인은 그 여섯 프랑으로 새 구두를 사거나 책을 샀을 것이다. 깨진 유리는 구두장수에게 갔을 돈을 유리장수에게로 옮겼을 뿐, 마을에는 단 한 푼의 새 부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멀쩡한 유리 하나가 사라졌으니 마을은 정확히 그만큼 가난해졌다. 바스티아는 이 글에 제목을 붙였다. 보이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 그가 평생을 걸고 가르치려 한 건 단 하나였다. 사람은 눈앞에 벌어진 일은 보지만, 그 일 때문에 일어나지 못한 일은 보지 못한다. 그리고 진짜 값은 늘 그 보이지 않는 쪽에 숨어 있다.

여기서 네가 알아둘 게 있다. 바스티아는 이걸 깨우쳤지만 거기에 이름을 붙이지는 못했다. 보이지 않는 그 대가에 '기회비용'이라는 이름이 또렷이 박힌 건 그보다 반세기 뒤, 오스트리아 빈에서였다. 프리드리히 폰 비저라는 경제학자가 20세기 초, 1914년의 저작에서 비용이라는 말의 뜻 자체를 뒤집어 못 박았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비용이라 하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과 재료, 즉 등 뒤로 이미 치른 것들을 떠올렸다. 비저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것의 진짜 비용은 그걸 만드느라 들인 게 아니라, 그 자원으로 만들 수 있었던 다른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한 값이라고. 비용은 과거에 쏟은 것이 아니라 미래에 단념한 것이다. 그가 독일어로 쓴 그 말이 영어로 건너와 오퍼튜니티 코스트, 기회비용이 되었다. 바스티아가 손으로 가리킨 그 보이지 않는 유령에, 비저가 비로소 이름표를 달아 준 셈이다.

이름이 생기자 이 생각은 경제학의 가장 깊은 뿌리로 자라 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자원은 한정돼 있고, 무엇 하나를 택한다는 건 곧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한 나라가 가진 땅과 사람과 돈으로 대포를 더 만들 것인가 빵을 더 만들 것인가, 이 고전적 물음의 답은 늘 기회비용으로 잰다. 대포의 값은 그 쇳덩이의 가격이 아니라, 그 쇳덩이로 구웠을 빵의 양이다. 이 발상이 학문 전체의 사고 단위가 되면서, 경제학은 '무엇이 좋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는가'를 따지는 학문으로 그 윗단추가 바뀐다.

이 도구를 가장 멀리까지 휘두른 사람을 꼽자면, 나는 다시 바스티아의 그 한 줄로 돌아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 1946년, 헨리 해즐릿이라는 미국 언론인이 경제학을 단 한 줄로 요약한 책을 쓰면서, 자기 책의 뼈대를 통째로 바스티아의 그 깨진 유리창에서 빌려 왔다고 고백한다. 그가 정리한 경제학의 단 하나의 교훈이란 이런 거였다. 어설픈 사람은 어떤 정책의 눈에 보이는 즉각적 효과만 보고, 제대로 보는 사람은 그 정책이 보이지 않게 밀어낸 모든 결과까지 끝까지 따라가 본다. 다리를 놓으면 일자리가 생긴다는 말은 절반의 진실이다. 그 다리에 쓴 세금이 사람들 주머니에 남았다면 무엇이 되었을지, 그 보이지 않는 다른 일자리들을 함께 세어야 비로소 답이 나온다. 기회비용이라는 잣대가 없으면 세상의 거의 모든 그럴듯한 헛소리에 속아 넘어간다는 것. 그게 바스티아에서 해즐릿으로 이어진 한 세기의 가르침이다.

이 생각이 컴퓨터로 들어갈 때에도 핵심은 똑같다. 자원은 늘 모자라고, 하나를 쓰면 다른 하나를 못 쓴다. 기계가 어디에 메모리를 내줄지, 어느 작업에 시간을 쪼개 줄지를 정할 때, 잘 만들어진 시스템은 늘 '이걸 여기 쓰면 저기 못 쓴다'는 포기의 값을 계산에 넣는다.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자리는 탐색과 활용의 줄다리기다.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은 매 순간 갈등한다. 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길로 안전하게 갈 것인가, 아직 안 가 본 길을 시험 삼아 가 볼 것인가. 익숙한 길을 한 번 더 가는 순간, 새 길에서 발견했을지 모를 더 좋은 결과를 포기하는 셈이고, 새 길을 시험하는 순간, 검증된 보상을 한 판 포기하는 셈이다. 어느 쪽을 골라도 포기하는 게 있다. 기계가 이 줄다리기를 제대로 하려면 사람과 똑같은 깨달음에 도달해야 했다. 어떤 선택의 값은 그 선택이 가져다준 것만으로 매겨선 안 되고, 그 대신 포기한 다른 길의 값까지 셈에 넣어야 한다는 것. 눈앞에 받은 보상만 보고 한 길에 눌러앉는 기계는, 더 좋은 길을 영영 못 본 채 보이지 않는 비용을 줄줄 흘린다. 바스티아가 구경꾼들에게 했던 바로 그 잔소리를, 우리는 이제 기계에게 코드로 새겨 넣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가 무언가를 거저 얻었다고 느끼거나, 어떤 선택이 분명히 이득이라고 확신이 설 때 — 바로 그때 멈춰서 보이지 않는 쪽을 봐라. 이걸 택함으로써 내가 동시에 버린 가장 좋은 다른 길은 무엇인가. 그 버린 길의 값이 곧 지금 이 선택의 진짜 가격이다. 공짜는 없다. 표값이 0원인 영화에도 두 시간이라는 값이 매겨져 있다. 눈에 보이는 가격표가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포기를 세는 눈, 그게 깨진 유리창 하나에서 시작된 생각의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