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적 판단 (intuition)
차근차근 따지는 의식적 추론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머릿속에 즉각 떠오르는 판단, 또는 그 판단을 믿고 채택하는 사고법. 오랜 경험으로 몸에 밴 패턴이 의식의 밑바닥에서 작동해 '왜인지는 몰라도 이게 맞다'는 앎을 단숨에 내놓는다는 점이 핵심이다.
너, 불타는 집 안에 호스를 들고 서 있다고 해보자. 부엌 쪽에서 불길이 솟구쳐 네 부하들과 물을 뿌리는데, 어쩐지 불이 죽지를 않는다. 그 순간 등줄기에 까닭 모를 한기가 스친다. 머리로는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았는데, 입이 먼저 외친다. "전원 후퇴, 당장 나가." 부하들이 영문도 모른 채 길거리로 뛰쳐나온 바로 그 직후, 방금까지 너희가 서 있던 거실 바닥이 통째로 꺼져 내린다. 불은 부엌이 아니라 발밑 지하실에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 초만 늦었어도 모두 불구덩이로 떨어졌다. 나중에 누가 묻는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너는 답한다. "그냥… 느낌이 안 좋았어요." 오늘 이야기는, 이 '그냥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게 언제는 목숨을 구하고 언제는 너를 속이는지를 평생 다툰 두 사람에 관한 거다.
방금 그 장면은 지어낸 게 아니다. 인지심리학자 게리 클라인이 1980년대에 소방 지휘관들을 따라다니며 채집한 실제 사례다. 그 노련한 지휘관은 자기 능력을 '육감'이라 불렀지만, 클라인이 끈질기게 파고들자 진실이 드러났다. 그가 본 불은 부엌 화재치고는 너무 조용했고, 물을 끼얹어도 반응이 없었고, 방의 열기가 묘하게 잘못돼 있었다. 수백 번의 화재 현장에서 몸에 새긴 '정상적인 부엌 불'의 그림과 눈앞의 장면이 어긋났던 것이다. 그 어긋남을 의식이 따라잡기 전에, 그의 몸이 먼저 경보를 울렸다. 클라인은 이걸 '재인 기반 결정'이라 이름 붙였다. 전문가는 선택지를 죽 늘어놓고 비교하지 않는다. 상황을 보는 순간 이미 답을 알아본다. 직관이란 초자연적 예지가 아니라, 쌓인 경험이 패턴을 알아채는 일이 너무 빨라서 추론의 단계가 통째로 건너뛰어진 것뿐이다.
그런데 이 '빨리 알아봄'의 정체를 끝까지 해부해 보인 더 오래된 실험이 있다. 무대는 체스판이다. 네덜란드의 아드리안 더 흐로트는 대략 20세기 중엽, 체스 고수와 초보에게 실제 대국 중의 판을 딱 5초만 보여 주고 치우게 한 뒤 그대로 복기시켰다. 고수는 스무 개 넘는 말의 위치를 거의 완벽히 되살렸다. 초보는 네댓 개에서 막혔다. 여기까지면 '고수는 기억력이 좋구나'로 끝날 뻔했다. 그런데 1973년, 허버트 사이먼과 윌리엄 체이스가 결정적인 한 수를 더 두었다. 이번엔 말들을 판 위에 아무렇게나, 실제 대국에선 나올 수 없는 엉터리로 흩어 놓고 똑같이 보여 준 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수의 그 신묘하던 기억력이 초보 수준으로 폭삭 주저앉았다. 둘이 똑같이 네댓 개에서 헤맸다. 이게 무얼 뜻하느냐. 고수는 '말 하나하나'를 외운 게 아니었다. 수천 판을 두며 머릿속에 쌓아 둔 '의미 있는 말의 덩어리' — 이 진형, 저 공격 형태 — 를 통째로 한 번에 알아본 것이다. 의미 있는 판이면 덩어리로 척 잡히지만, 의미 없이 흩어 놓으면 잡을 덩어리가 없으니 평범한 눈이 되어 버린다. 사이먼은 고수의 머릿속에 이런 패턴 덩어리가 오만에서 십만 개쯤 저장돼 있으리라 추정했다. 직관이란 결국 이 십만 개의 서랍이, 상황을 보는 순간 저절로 열리는 일이다. 본인은 서랍이 열리는 줄도 모른 채.
여기서 이야기에 팽팽한 긴장이 선다. 같은 시대에 정반대를 외친 사람이 있었다. 대니얼 카너먼. 그는 평생을 인간의 직관이 '얼마나 한심하게 우리를 속이는가'를 폭로하는 데 바친 사람이다. 사람은 쉽게 떠오르는 걸 흔한 일로 착각하고, 처음 들은 숫자에 닻을 내리고, 멀쩡한 우연을 운명으로 읽는다. 카너먼에게 직관은 게으른 사기꾼이었다. 한쪽엔 목숨을 구하는 소방관의 직관을 떠받드는 클라인, 다른 쪽엔 직관을 믿지 말라 외치는 카너먼. 보통이라면 둘은 서로를 무시하고 각자의 진영에 머물렀을 거다. 그런데 이 둘이 한 일이 비범했다. 적대적 협업이라 부를 만한 것을 자청한 거다. 서로를 논박하려고 무려 육 년을 함께 머리를 맞댔다. 한쪽은 직관이 천재적인 사례를, 다른 쪽은 직관이 멍청한 사례를 들이밀며 끝장을 보려 했다.
그렇게 다투다 둘이 마침내 합의에 이른 결론을, 그들은 2009년에 '직관적 전문성의 조건 — 의견 불일치에 실패하다'라는 묘한 제목의 논문으로 내놓았다. 합의의 핵심은 이거다. 직관을 믿어도 좋으냐 아니냐는, 직관을 가진 사람의 자신감으로 판가름 나지 않는다. 오직 두 가지로 결판난다. 첫째, 그가 일한 세계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곳이었나. 둘째, 그가 그 규칙을 익힐 만큼 충분한 피드백을 받으며 오래 굴렀나. 불은 물리법칙대로 번지고 소방관은 수백 번 그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한다. 그래서 소방관의 직관은 믿을 만하다. 반면 주식시장의 다음 달은 규칙 없이 출렁이고, 어제의 예측이 맞았는지 또렷이 돌아올 길도 없다. 그래서 '느낌으로 종목을 찍는' 직관은 아무리 당당해도 허깨비다. 같은 직관이라도 규칙적인 세계에서 오래 단련된 것이면 마법이고, 무질서한 세계에서 끌어온 것이면 망상이다. 직관 자체에 죄를 묻지 말고, 그 직관이 자라난 토양을 물으라는 것 — 두 천재가 육 년을 싸워 길어 올린 결론이 이 한 줄이다.
이 패턴 덩어리의 직관이 기계에 옮겨 앉는 과정에선, 생각의 윗단추가 한 번 통째로 갈렸다. 초기의 체스 기계는 사이먼이 본 고수와 정반대로 움직였다. 직관 따위 없이, 가능한 수를 무지막지하게 끝까지 계산해 들어가는 무식한 힘으로 사람을 이기려 했다. 그런데 바둑에선 그 무식한 힘이 통하지 않았다. 갈림길이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아 끝까지 셀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돌파구는 발상을 뒤집고서야 열렸다. 모든 수를 다 계산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대신 수십만 판의 기보를 기계에 들이부어 '이 국면에선 이쯤이 좋다'는 감(感) 자체를 기계가 스스로 익히게 한 것이다. 2016년 이세돌을 꺾은 그 프로그램이 보여 준, 인간 해설자조차 '왜 저기 두는지 모르겠다'던 그 신묘한 한 수 — 그게 바로 기계가 학습으로 빚어낸 직관이었다. 규칙을 일일이 적어 주던 자리에서 사례로부터 감을 익히게 하는 자리로 틀을 갈아엎고 나서야, 비로소 기계도 더 흐로트의 고수처럼 판을 '느낄'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러니 너가 머리로는 설명 못 하겠는데 '이건 아니다' 싶은 직감이 등줄기를 칠 때, 그걸 무작정 따르지도 무작정 무시하지도 마라. 딱 두 가지만 자신에게 물어라. 이건 내가 비슷한 상황을 수없이 겪어 본 분야인가, 그리고 그때마다 내 판단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분명히 확인하며 배워 왔는가. 둘 다 '그렇다'면, 그 까닭 모를 한기는 네 십만 개의 서랍이 보내는 진짜 경보다 — 소방관처럼 일단 몸을 빼라. 둘 중 하나라도 '아니다'면, 그 당당한 느낌은 카너먼의 사기꾼일 공산이 크니 차갑게 따져 보라. 직관을 신처럼 떠받들 일도, 미신으로 내칠 일도 아니다. 그것이 어떤 땅에서 자란 직관인지를 묻는 것,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