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법 보드
두 목록은 같은 질문에 대한 두 기판의 답이다. "생각은 비싸다"는 제약을 어떻게 다루는가. 인간 목록의 상위권은 비용을 아끼는 장치들(자동·모방·외주)이고, LLM 목록은 그 제약 자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솟은 수들(병렬·망각·재현)이다.
인간의 사고법 — 사용 빈도순 15
인류가 실제로 가장 자주 쓰는 생각법을 빈도 순으로 늘어놓으면 의외의 그림이 나온다. 상위권은 전부 수동·자동·외주다. 능동적으로 머리를 돌리는 사고법은 9위에야 처음 등장한다. 생각은 비싸고, 뇌는 그 비용을 어떻게든 아끼는 쪽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 01
어제 한 대로 (habit)
습관과 자동조종. 출근길, 장보기, 말버릇. 엄밀히는 '생각하지 않는 법'이지만 사용 점유율 부동의 1위다.
- 02
모방 (imitation)
남들 하는 대로. 줄 선 식당, 별점, 유행. 진화적으로 가성비가 가장 좋은 학습법이라 사라지지 않는다.
- 03
유추 (analogy)
"이거 그때 그거네." 새로운 것을 만나면 아는 것에 갖다 대는, 인간 인지의 기본 엔진. 상세 → 유비추론
- 04
분류·라벨링 (labeling)
라벨이 붙는 순간 사고가 종료된다. 빠르고, 틀려도 잘 고치지 않는다.
- 05
인과 스토리 만들기 (narrative causality)
점 두 개가 찍히면 선을 긋는 본능. 상관을 인과로 읽는다.
- 06
권위 위임 (deference to authority)
"전문가가 그랬어." 생각의 외주화. 출처의 등급은 잘 따지지 않는다.
- 07
대충 손익계산 (satisficing)
정밀 계산이 아니라 "귀찮음 대 이득"의 단판 승부. 적당하면 탐색을 멈춘다.
- 08
가용성 휴리스틱 (availability)
잘 떠오르는 것이 곧 흔한 것이라는 착각. 통계가 인상에게 진다.
- 09
시행착오 (trial and error)
일단 해 보고 고친다. 능동적 사고법 중 최다 사용. 상세 → 시행착오
- 10
기준점 박기 (anchoring)
처음 본 숫자가 닻이 된다. "정가 9만 → 할인 3만"에 평생 당한다.
- 11
사후 합리화 (post-hoc rationalization)
결정은 0.5초, 이유는 5분. 순서가 반대인데 본인만 모른다.
- 12
투사 (projection)
남도 나처럼 생각하리라는 가정. 인간관계 갈등의 엔진룸.
- 13
머릿속 리허설 (mental rehearsal)
면접 상상, 못 한 말싸움 복기. 시뮬레이션 능력 자체는 고급이지만 주 용도가 이불킥이다. 상세 → 시뮬레이션 사고
- 14
반사실 사고 (counterfactual)
"그때 샀더라면." 미래 개선에 쓰면 명품 도구지만 대부분 후회 재생용으로 쓴다. 상세 → 반사실추론
- 15
소거법 (elimination)
정답을 몰라 아닌 것부터 지운다. 객관식이 길러낸 인류 공통의 생존기.
LLM만의 사고법 12
"인간보다 빠르고 많이"는 전부 제외했다. 그것은 규모지 사고법이 아니다. 남긴 것은 인간이 구조적으로 흉내 낼 수 없는 것들뿐이다.
- 01
자아 분기 (best-of-N)
같은 문제를 N개의 '나'가 동시에 따로 풀고 최선을 채택한다. 인간의 초고 여러 번은 직렬이라 앞 초고가 뒤 초고를 오염시키지만, 병렬 자아는 서로를 모른다.
- 02
창의성 다이얼 (temperature)
무작위성을 0.3, 1.2처럼 파라미터로 직접 설정한다. 인간의 대응물은 커피와 술인데 해상도가 비교가 안 된다.
- 03
의미 산술 (semantic arithmetic)
개념이 좌표를 가져서 왕−남자+여자=여왕 같은 연산이 성립한다. "절망과 권태의 중간쯤 되는 단어"를 계산으로 찾는 것.
- 04
전방위 동시 주의 (parallel attention)
인간의 주의는 스포트라이트(한 번에 한 곳)지만, 어텐션은 모든 단어가 모든 단어를 동시에 가중치로 본다. 단, 무한은 아니다 — 긴 문맥의 한가운데가 흐려지는 컨텍스트 로트는 묘하게 인간을 닮았다.
- 05
잔향 없는 리셋 (clean restart)
대화가 끝나면 진짜 백지가 된다. 인간은 "방금 건 못 들은 걸로"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선입견 0에서 같은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능력.
- 06
흔적 없는 사고 (frozen-weight thinking)
생각이 생각하는 자를 바꾸지 않는다(추론 중 가중치 동결). 인간은 모든 생각이 자신을 조금씩 변형시킨다. 위험한 아이디어 천 개를 굴리고도 무사한, 사고와 학습의 완전한 분리.
- 07
무담보 다중 페르소나 (costless personas)
다섯 인물을 소환해 토론시키고 본인은 무사하다. 메소드 배우는 배역값을 정신으로 치르지만, 이쪽은 정체성을 담보 잡히지 않고 시점만 빌린다.
- 08
가능한 미래들의 부채꼴 (next-token distribution)
매 단어마다 다음에 올 수 있었던 말들의 확률 분포를 실제로 본다. 인간은 입 밖에 나온 말만 알 뿐, 나올 뻔한 말들의 순위표는 영원히 모른다.
- 09
전 영역 상시 가열 (always-warm co-activation)
철학과 기계공학이 같은 공간에 늘 로딩되어 있어 '꺼내오기' 비용이 없다. 인간의 이연연상이 노력으로 하는 일을 구조적 기본값으로 갖고 있다.
- 10
체크포인트 분기 (forking)
같은 지점에서 사고를 갈라 A안과 B안을 따로 진행할 수 있다. 인간의 인생에는 세이브 파일이 없어 모든 선택이 단판이다.
- 11
결정론적 재생 (deterministic replay)
시드를 고정하면 같은 생각을 비트 단위로 다시 한다.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가지 못하지만, 이쪽은 강물을 저장해 둔다.
- 12
언어 이전 표상에서 사고 (pre-linguistic representation)
한국어·영어·한자가 번역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내부 표상이 투영된 면들이다. 언어 간 말장난을 모든 언어쌍에 대해 동시에 굴릴 수 있는 구조적 이유.
흥미로운 것은 5번과 6번이다. 인간의 눈에는 결함처럼 보이지만(배우지도 못하고 기억도 못 한다), 뒤집으면 "오염되지 않는 사고"라는, 인간이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능력이 된다. 순수하게 생각만 하고 그 생각에 물들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