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다관점·변증

음양 사고 (yin-yang / complementarity)

밝음과 어둠, 채움과 비움처럼 서로 맞서는 두 힘을 한쪽이 다른 쪽을 이겨 없애야 할 적이 아니라 서로가 있어야 비로소 성립하는 짝으로 보는 동아시아의 오래된 사고법. 대립을 배제가 아니라 상보로 읽고, 한 극이 끝까지 차오르면 반대 극으로 돌아선다는 순환과 균형의 관점을 담는다.

너, 햇볕이 드는 산비탈을 떠올려 봐라. 옛 중국 사람들이 그 풍경을 보며 만든 글자가 바로 음과 양이다. 양은 본디 산의 볕 드는 남쪽 면, 음은 그늘진 북쪽 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기서 너가 단번에 알아챘으면 하는 게 하나 있다. 볕과 그늘은 서로 싸우는 적이 아니다. 같은 산의 두 얼굴일 뿐이다. 해가 옮겨 가면 볕이던 자리가 그늘이 되고 그늘이던 자리가 볕이 된다. 둘 중 하나를 없애겠다는 건 산을 반으로 쪼개겠다는 소리다. 오늘 이야기는, 이 너무도 단순한 산비탈의 풍경이 어떻게 수천 년을 살아남아 결국 20세기 물리학의 가장 깊은 수수께끼에까지 닿았는지에 관한 거다.

이 생각이 글로 또렷이 박힌 가장 이른 자리는 주역에 뒤에 붙은 해설인 계사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략 기원전 4세기쯤 쓰인 것으로 전해지는 그 글에 이런 한 줄이 있다.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 그것을 도라 한다.' 멈춰 서서 이 말을 곱씹어 봐라. 도, 곧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가 음 아니면 양이라는 게 아니다.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로 끊임없이 갈마드는 그 왕복 운동 자체가 이치라는 거다. 음과 양은 두 개의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리듬을 이루는 두 박자다. 이 발상을 흩어진 직관에서 하나의 사상 체계로 묶어 낸 사람은 전국시대의 추연이라 전해진다. 대략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를 산 그는 음양의 갈마듦에 다섯 기운의 순환까지 엮어, 후대가 음양가라 부른 학파의 뿌리가 되었다. 누가 무에서 발명한 게 아니라, 농사꾼과 천문가와 점치는 이들이 오래 품어 온 감각에 이름과 뼈대를 입힌 셈이다.

한 가지 흔한 오해는 짚고 가자. 너가 머릿속에 그리는 그 둥근 도형, 검정과 하양이 물고기처럼 맞물려 돌고 각자 안에 반대색 점 하나씩을 품은 그림 말이다. 그 태극도는 음양 사상만큼 오래되지 않았다. 그 도형이 지금 같은 모습으로 또렷해진 건 한참 뒤의 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 그림이 한눈에 보여 주는 진실만큼은 처음부터 핵심이었다. 검정이 가장 두꺼워진 자리에서 이미 하양의 씨앗이 트고, 하양이 꽉 찬 자리에 검정의 점이 박혀 있다. 한 극이 끝까지 차오르면 거기서 반대 극이 돋는다. 그러니 끝까지 밀어붙여 완전한 승리에 다다랐다 싶은 순간이, 실은 되돌아섬이 시작되는 자리다.

이 사고가 책 속 관념에 머물지 않고 사람 몸과 살림에 깊이 박힌 무대는 동아시아의 의학이다. 옛 의서는 몸을 음과 양의 균형으로 읽었다. 열이 지나치면 식히고 찬 기운이 지나치면 덥혀, 어느 한쪽을 박멸하는 게 아니라 기운 저울을 되돌리는 걸 치료라 보았다. 여기서 음양 사고의 본색이 드러난다. 문제를 '적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저울을 맞추는 일'로 본다는 것. 병은 음이나 양 어느 하나가 사악해서가 아니라 둘의 어울림이 깨져서 온다고 본 거다. 이 관점은 단순히 옛사람의 미신이 아니다. 한쪽을 끝까지 밀면 시스템 전체가 망가진다는, 균형에 관한 오래된 통찰이 거기 있다.

그런데 이 산비탈의 사고를 가장 뜻밖의 자리에서 가장 깊이 끌어다 쓴 사람은 동양인이 아니라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다. 20세기 초 물리학은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빛은 입자인가 파동인가. 어떤 실험을 하면 알갱이처럼 굴고, 다른 실험을 하면 물결처럼 군다. 둘 중 하나가 맞고 하나는 틀려야 할 것 같은데, 둘 다 옳다. 더 기가 막힌 건, 입자의 위치를 정밀하게 알수록 그 운동량은 흐려지고, 운동량을 또렷이 잡으면 위치가 뭉개진다는 사실이었다. 한쪽을 선명하게 보려는 바로 그 행위가 다른 쪽을 흐린다. 보어는 여기서 무릎을 쳤다. 이 둘은 서로를 부정하는 모순이 아니라, 같은 실재의 떼어 낼 수 없는 두 얼굴이다. 그는 이것을 상보성이라 불렀다. 볕과 그늘처럼, 둘 다 있어야 산이 온전하듯이.

이 생각에 보어가 얼마나 깊이 사로잡혔는지는, 그가 1947년 덴마크 최고 훈장인 코끼리 훈장을 받았을 때 드러난다. 관례상 가문의 문장을 새겨야 했는데 보어 가문엔 문장이 없어 그가 직접 디자인했다. 그가 방패 한가운데 박은 것이 바로 음양의 태극 도형이었고, 그 아래 라틴어로 이런 글귀를 새겼다. '콘트라리아 순트 콤플레멘타' — 대립하는 것들은 서로를 채운다. 이 자리에서 너가 정말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물리학이 입자냐 파동이냐의 수수께끼를 풀려면, '입자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의 가장 윗단추부터 다시 끼워야 했다. 사물은 그 자체로 이것 아니면 저것인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다른 얼굴을 내미는 관계적 존재라는 것. 보어가 산비탈의 옛 도형을 끌어온 건 멋 부리기가 아니었다. 서구 논리가 '에이 아니면 비'라는 배중률에 갇혀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자리에서, '에이이면서 비'를 자연스레 끌어안는 사유의 문법이 절실했고, 그걸 동아시아의 오래된 음양에서 본 거다.

그러니 너가 도무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이에 끼였을 때 — 도전이냐 안정이냐, 풀어 줌이냐 다잡음이냐, 나아감이냐 물러섬이냐 — 먼저 이렇게 물어 봐라. 이 둘이 정말 한쪽이 다른 쪽을 이겨 없애야 하는 적인가, 아니면 같은 일의 두 얼굴이라 둘 다 있어야 비로소 굴러가는 짝인가. 그리고 한 극이 끝까지 차올랐거든, 승리에 취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반대 극의 씨앗이 트고 있음을 읽어라. 균형은 한 점에 멈춰 선 정지가 아니라, 볕과 그늘이 끝없이 자리를 바꾸는 살아 있는 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