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관점 동시 보유 (multiperspectivism)
하나의 대상을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시각들이 저마다 그 대상의 한 측면을 진짜로 담고 있다고 보고, 양립하지 않는 그 시각들을 섣불리 하나로 합치거나 한쪽을 버리지 않은 채 나란히 쥐는 사고법. 어느 관점도 전체를 독차지하지 못하며, 더 많은 시점을 겹쳐 볼수록 대상이 더 온전히 드러난다고 본다.
너, 같은 도시를 두고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려 와 다투는 걸 본 적 있을 거다. 한 사람은 강 남쪽 언덕에서 봤고, 다른 사람은 북쪽 성문 앞에서 봤다. 한쪽 그림에는 큰 다리가 한복판을 가로지르는데 다른 쪽 그림엔 그 다리가 아예 없다. 둘은 서로 거짓말쟁이라 부른다. 그런데 너는 안다. 둘 다 같은 도시를 정직하게 그렸고, 단지 선 자리가 달랐을 뿐이라는 걸. 여기서 흔한 결말은 둘 중 하나다. 누가 더 좋은 자리에 섰는지 따져 한 그림을 '진짜'로 정하고 나머지를 버리거나, 두 그림을 억지로 포개 한 장으로 뭉개 버리거나. 그런데 아주 오래된 세 번째 태도가 있다. 두 그림을 합치지도 버리지도 않고, 두 장 다 벽에 나란히 걸어 둔 채 '이 도시는 이렇게 여러 얼굴을 가졌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세 번째 태도에 관한 거다.
방금 그 도시 비유는 사실 내가 지어낸 게 아니다. 대략 18세기 초, 독일의 라이프니츠가 세상의 가장 작은 알갱이들이 저마다 우주를 어떻게 비추는지를 설명하면서 꺼낸 그림이다. 그는 1714년의 글에서, 같은 도시도 보는 방향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마치 여러 개의 도시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도시를 저마다의 시점에서 본 것일 뿐이라고 적었다. 세상은 하나인데, 그 하나를 비추는 시점은 무수히 많고 서로 겹치지 않는다는 것. 양립 안 하는 여러 시각이 다 옳을 수 있다는 발상의 씨앗이 여기 있었다.
이 씨앗에 이름을 붙이고 날을 세운 사람은 19세기 말 독일의 니체다. 그가 던진 도전은 무서운 거였다. 그때까지 학문이 꿈꾸던 이상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시선', 곧 아무 데도 서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눈 같은 객관이었다. 니체는 그런 건 없다고 못 박았다. 본다는 건 늘 어딘가에 서서 보는 일이고, 선 자리 없는 시선이란 애초에 시선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비튼 한 수가 절묘하다. 그는 객관을 포기하라고 한 게 아니라, 객관이 무엇인지를 뒤집었다. 1887년 '도덕의 계보'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 오직 관점에서 보는 봄, 오직 관점에서 아는 앎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의 같은 사태에 더 많은 눈을, 서로 다른 눈을 들이댈수록 그 사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우리의 객관성은 그만큼 더 온전해진다. 객관이란 시점을 지우는 게 아니라 시점을 더 많이 겹쳐 쌓는 일이라는 것. 이 생각을 사람들은 관점주의라 부르게 됐다.
니체의 이 폭탄에는 함정이 하나 도사리고 있었다. 모든 시각이 다 한 조각씩 옳다면, 그럼 아무거나 다 맞다는 소리 아닌가. 진실이고 뭐고 다 사람 나름이라는 허무로 미끄러지기 딱 좋다. 이 함정을 정면으로 막아선 사람이 20세기 초 스페인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다. 그는 1923년 '우리 시대의 과제'에서, 관점이 여럿이라는 게 진실이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각 관점은 그 자리에서만 잡히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실재의 한 측면이다. 강 남쪽에서만 보이는 다리의 그림자가 있고 북쪽에서만 보이는 성벽의 결이 있다. 그러니 시점들을 합산하고 겹쳐 갈수록 우리는 거짓이 아니라 진실에 더 다가간다. 그가 못 박은 핵심은 이거다. 틀린 관점은 단 하나뿐이다 — 자기만이 유일한 관점이라고, 자기 자리에서 본 게 도시의 전부라고 우기는 관점. 다관점을 쥔다는 건 모든 걸 허용하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시점의 독재를 거부하는 일이다.
이 사고법을 가장 멀리까지, 가장 눈부시게 밀어붙인 사람은 뜻밖에도 철학자가 아니라 한 문학 비평가다. 20세기 러시아의 미하일 바흐친.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파고들다 다른 누구도 못 한 일을 그 작가가 해냈음을 알아챘다. 보통 소설에서는 작가가 신처럼 위에 앉아 모든 인물을 자기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고, 결국 작가의 한 목소리가 옳고 그름을 정리한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달랐다. 거기엔 서로 녹아 섞이지 않는, 저마다 끝까지 자기 세계를 고집하는 여러 의식이 동등한 권리로 공존한다. 신을 부정하는 자와 믿는 자, 죄인과 성자가 한 작품 안에서 부딪히는데, 작가는 어느 누구의 편도 들어 승부를 내 주지 않는다. 바흐친은 이걸 여러 성부가 동시에 울리는 음악에 빗대 다성성, 곧 폴리포니라 불렀다 — 서로 독립되어 섞이지 않은 채 저마다 온전히 유효한 목소리들의 어우러짐. 작가가 인물들 위에 군림해 한 목소리로 정리해 버리는 유혹을 끝까지 참아 낸 그 자리에서, 인간을 그 누구보다 깊이 본 소설이 태어났다. 양립 못 하는 시선들을 섣불리 화해시키지 않고 끝까지 나란히 살려 둔 것 — 그게 그 위대함의 비밀이었다.
그러니 너가 도무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견해 사이에 서게 되거든, 어느 쪽이 진짜인지부터 가려 한쪽을 버리려 들지 마라. 둘을 억지로 한 문장으로 봉합해 뭉개지도 마라. 먼저 물어라. 이 사람은 어느 자리에 서서 이걸 보았는가, 그 자리에서만 보이는 게 무엇인가. 두 그림을 벽에 나란히 걸어 두고 한동안 함께 쥐고 있어라. 봉합은 그다음 일이고, 끝내 봉합이 안 되더라도 괜찮다. 가장 위험한 단 하나의 오류는, 네가 지금 선 자리에서 본 것이 도시의 전부라고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