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다관점·변증

역지사지 (perspective-taking)

내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을 잠시 접어 두고, 상대가 선 자리로 옮겨 가 그 사람의 눈높이와 시야로 같은 상황을 다시 보는 사고법. 단순히 상대 입장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며 어디서부터 세상을 보는지를 머릿속에 다시 세워 보는 인지적 작업이다.

너, 작은 아이 앞에 산봉우리 세 개를 본뜬 모형을 놓아 봤다고 해 보자. 큰 산, 가운데 산, 작은 산이 줄지어 있고, 너는 아이 맞은편에 앉아 있다. 너에게는 작은 산이 왼쪽이지만, 마주 앉은 아이에게는 그게 오른쪽이다. 이제 아이에게 묻는다. 내 자리에 인형을 하나 앉혀 두고, 저 인형 눈에는 산이 어떻게 보일 것 같으냐고. 네 살, 다섯 살짜리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자기가 지금 보는 그대로를 고른다. 인형이 정반대편에서 본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 자리로 시선을 옮겨 앉는 일을 못 한다. 아이에게 세상은 아직 오직 자기 눈에 비친 풍경 하나뿐이다. 오늘 이야기는, 인간이 이 한 칸을 건너뛰어 남의 자리로 옮겨 앉기까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그걸 해내는 능력에 사람들이 어떻게 이름을 붙여 왔는지에 관한 거다.

방금 그 산 모형은 내가 지어낸 게 아니다. 대략 1940년대 후반,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가 동료 베르벨 인헬더와 함께 아이들에게 실제로 들이민 실험이다. 흔히 세 산 과제라 불린다. 피아제는 아이가 자기 시점에 갇혀 남의 시점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 상태를 자기중심성이라 불렀다 — 잘난 척한다는 뜻의 이기심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세상의 중심에 제 눈이 박혀 있어 다른 눈으로 갈아 끼우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며 어느 시점에 이 벽을 넘어, 마주 앉은 인형의 자리에서 산을 다시 배열할 줄 알게 되는 것을 발달의 한 분기점으로 보았다. 너와 내가 어른이 되어 당연하게 여기는 이 능력, 남의 자리로 잠깐 옮겨 앉는 이 일이, 실은 아무 데서나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의 머릿속에서 따로 자라나야 하는 기능임을 피아제는 산봉우리 세 개로 보여 준 셈이다.

이 능력에 동양은 훨씬 오래전에 네 글자를 붙여 두었다. 역지사지. 전해지기로 그 뿌리는 대략 기원전 4세기 맹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맹자는 부지런했던 옛 성인들과 가난 속에서도 도를 즐긴 안회를 견주며, 자리를 바꿔 놓으면 모두가 똑같이 했을 것이다, 곧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 했다. 처지가 달라 행동이 달라 보일 뿐, 자리를 맞바꾸면 너도 그가 했을 일을 했으리라는 통찰이다. 여기서 핵심은 동정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선 땅(地)으로 내 발을 옮겨(易) 그 자리에서 헤아린다(思)는, 시점을 통째로 갈아 끼우는 작업이다. 같은 직관을 18세기 유럽에서 애덤 스미스도 붙잡았다. 우리가 흔히 보이지 않는 손의 경제학자로만 아는 그 사람은, 1759년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어떻게 남의 고통을 제 일처럼 느끼는가를 파고들었다. 스미스의 답은 차가우리만치 정확했다. 우리는 남의 아픔을 직접 느끼는 게 아니라, 상상 속에서 그의 처지로 자리를 옮겨 앉아 내가 저기 있다면 어떨까를 그려 보는 것이다. 그는 우리 마음속에 공정한 관찰자 한 명을 세워 두라고까지 했다. 내 편도 네 편도 아닌 제삼의 자리에서 양쪽을 다 내려다보는 눈을.

그런데 이 도구를 가장 실전에서 벼린 사람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협상가였다. 1981년, 하버드의 로저 피셔와 윌리엄 유리가 협상의 고전이 된 책 한 권을 내놓는다. 그들이 거기서 못 박은 한 문장이 이 사고법의 정수다. 상대를 설득하려거든, 그 상황을 상대가 보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단지 그의 입장을 아는 데 그치지 말고, 그 입장이 그에게 얼마나 절실하게 느껴지는지까지 감정의 무게로 헤아리라는 것이다. 협상이 깨지는 흔한 이유는 상대가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선 자리에서는 너무도 합리적인 두려움과 체면과 사정을, 내 자리에서만 바라보며 어리석다 단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협상하는 자는 먼저 책상을 돌아 상대 의자에 앉아 본다. 저 사람이 여기서 '예'라고 답하면, 돌아가 그의 상사에게, 그의 가족에게, 그의 양심에게 무어라 설명해야 하는가. 그 대답이 그려지기 전에는 어떤 제안도 던지지 않는다. 역지사지가 따뜻한 덕목이 아니라 차가운 무기로 쓰이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이 능력은 컴퓨터 앞에서 뜻밖의 시험대에 오른다. 심리학에는 마음 이론이라는 더 깐깐한 판본이 있다. 대략 1980년대, 연구자들은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 아이가 초콜릿을 서랍에 넣고 밖에 나간 사이, 엄마가 그걸 다른 곳으로 옮긴다. 자, 돌아온 아이는 어디서 초콜릿을 찾을까. 어린아이는 자기가 아는 진짜 위치를 댄다. 그 아이의 머릿속에 '사실과 어긋난, 틀린 믿음'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남의 자리에 앉는다는 게 풍경뿐 아니라 그 사람의 틀린 앎까지 내 머릿속에 따로 세워 보는 일임을, 이 과제가 드러낸다. 그리고 최근 인공지능을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이 과제를 거대 언어 모델에게 똑같이 던지기 시작했다. 기계가 '저 인물은 사실과 다른 것을 믿고 있다'를 추론해 낼 수 있는가. 어떤 모델은 곧잘 풀어내 화제가 됐고, 곧바로 질문을 살짝 비틀면 와르르 무너진다는 반박이 따라붙어, 지금도 결론은 열려 있다. 다만 여기서 네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기계가 이걸 해내려면, 세상에 관한 사실을 쌓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저 마음속에는 세상과 어긋난 또 하나의 세계 지도가 들어 있다'는 한 층 위의 틀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사실의 목록을 넘어 남의 머릿속 지도를 따로 모델링하는 단계 — 생각의 윗단추를 새로 끼우는 그 자리에서, 기계든 사람이든 똑같이 휘청인다.

그러니 너가 상대를 도무지 이해 못 하겠다 싶은 순간, 저 사람 왜 저렇게 비합리적이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거든, 바로 그때가 의자를 바꿔 앉을 때다. 네 눈에 보이는 풍경을 잠시 접고, 그가 선 자리에서는 무엇이 보이는지, 그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며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네 머릿속에 다시 세워 보라. 다섯 살 아이가 못 하던 그 한 칸 — 마주 앉은 자리로 옮겨 산을 다시 배열하는 일 — 을 어른인 너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다만 마음을 먹어야만 된다는 게, 이 오래된 사고법이 끝내 일러 주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