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 보류 (dialectical holding)
서로 대립하는 두 입장(정과 반)을 성급히 하나로 봉합하거나 한쪽으로 결론 내리지 않고, 그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의도적으로 붙들어 두는 사고 태도. 모순을 빨리 해소해야 할 불편이 아니라 더 깊은 이해를 끌어내는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종합을 향해 달려가는 통상의 변증법과 갈라진다.
너, 머릿속에서 두 생각이 정면으로 부딪치는데 어느 쪽도 놓을 수가 없을 때가 있지. 이 사업은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동시에 기어이 되게 만들고 싶다. 저 사람 말이 틀렸다, 그런데 동시에 일리가 있다. 보통 우리는 이 어긋남이 못 견디게 불편해서, 둘 중 하나로 빨리 마음을 정해 버린다. 결론을 내야 머리가 편하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한다. 그 불편을 일부러 풀지 않은 채, 두 생각을 양손에 쥐고 한참을 그대로 버틴다. 답을 못 내서가 아니라, 너무 빨리 낸 답이 오히려 진실을 죽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늘 이야기는 그 '버티는 힘'에 관한 거다.
이걸 가장 멋진 문장으로 박아 놓은 사람은 소설가 피츠제럴드다. 1936년, 그가 술과 빚과 무너진 결혼으로 바닥을 치던 무렵 잡지에 쓴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일류 지성의 시험대는, 서로 반대되는 두 생각을 동시에 머릿속에 품고도 멀쩡히 기능하는 능력이라고. 그러고는 바로 예를 든다. 가령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걸 똑똑히 보면서도, 그럼에도 그걸 뒤집어 보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절망과 의지 — 둘 중 하나를 골라 다른 하나를 내다 버리는 게 아니라, 양쪽을 동시에 켜 둔 채로 사는 능력. 그게 그가 말한 일류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이 발상의 진짜 뿌리는 그보다 백 년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시인 존 키츠가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 슬쩍 흘려 적은 한 마디에서다. 대략 1817년 겨울, 스물둘의 키츠는 셰익스피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위대한가를 곱씹다가, 문득 한 자질에 이름을 붙인다. 그는 그걸 '소극적 수용력'이라 불렀다. 사람이 불확실함과 신비와 의심 속에 머물면서도, 사실과 이유를 향해 안달하며 손을 뻗치지 않는 능력. 모르는 걸 못 견뎌 서둘러 아무 답에나 가둬 버리는 대신, 모름 자체를 견디며 그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힘. 키츠가 보기에 위대한 작가는 세상의 모순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모순을 모순인 채로 끌어안고 견딜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짚자. 이 태도는 같은 시대에 독일에서 헤겔이 밀어붙이던 변증법과 형제이면서 동시에 반항아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과 반이 부딪치면 반드시 더 높은 종합으로 올라서며 모순이 해소된다는, 위를 향한 운동이었다. 모순은 거쳐 가는 정거장이고, 종착지는 화해다. 그런데 키츠가 가리킨 것, 그리고 우리가 변증법적 보류라 부르는 이 태도는, 바로 그 '서둘러 종합으로 도망치려는 충동'에 제동을 건다. 모순을 봉합하지 말고, 한쪽으로 무너뜨리지도 말고, 풀리지 않은 그 팽팽함 자체를 한동안 일터로 삼아라. 답으로 가는 계단이 아니라, 머무는 방으로 모순을 대하는 것이다.
이 머무는 태도를 아예 하나의 철학 방법으로까지 벼려 낸 사람이 20세기 독일의 테오도어 아도르노다. 그는 1966년에 낸 책에 '부정 변증법'이라는, 거의 도발에 가까운 이름을 붙였다. 헤겔이 모순을 종합으로 끌어올려 봉합한다면, 아도르노는 정확히 그 봉합을 거부했다. 그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대립을 매끈한 하나로 통합해 버리는 사고는, 어긋난 현실의 진짜 상처를 덮어 버리는 거짓이었다. 그가 다른 책에 남긴 서늘한 한 줄이 이걸 압축한다 — 전체야말로 거짓이라고. 그래서 그의 방법은 끝까지 결론을 내주지 않는다. 개념과 그 개념이 결코 다 담지 못하는 실제 사이의 어긋남을, 그 빈틈을 메우지 않고 계속 벌려 두는 쪽을 택했다. 불편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핵심이다. 너무 빨리 화해시킨 생각은 거기서 자라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이 도구가 가장 빛나는 자리는 따로 있다. 어설픈 종합이 오히려 재앙이 되는 곳들이다. 좋은 디자이너는 '단순하게'와 '풍부하게'라는 모순된 요구를 어느 한쪽으로 일찍 꺾지 않고 끝까지 같이 끌고 가다 더 나은 형태를 길어 올린다. 노련한 협상가나 외교관은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진영의 요구를 한쪽으로 서둘러 정리하는 대신, 그 긴장 위에 오래 머물며 누구도 미리 못 본 제3의 길이 떠오를 여지를 남긴다. 깊은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쪽 가치를 깔끔히 이겨 먹는 답은 대개 다른 쪽 가치를 학살한 답이다. 진짜 성숙은 그 둘을 동시에 무게 있게 느끼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판단을 끌고 가는 데 있다. 피츠제럴드가 말한 '절망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뒤집겠다고 결심하는' 그 능력 말이다.
이건 동양의 옛 지혜와도 묘하게 맞닿는다. 음과 양처럼, 대립하는 둘을 한쪽이 다른 쪽을 멸하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를 품고 도는 관계로 보는 시선 말이다. 거기서도 긴장은 없애야 할 결함이 아니라 만물을 굴리는 동력이다. 변증법적 보류는 결국 그 오래된 직관 — 모순을 견디는 자리에서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직관 — 을 사고의 도구로 벼린 것이다.
그러니 너가 머릿속에서 두 입장이 끝장을 보겠다는 듯 맞붙고, 빨리 한쪽으로 정해 이 불편을 끝내고 싶어 안달이 나거든, 바로 그 순간을 의심해라. 그 조급함이야말로 키츠가 경계한 '안달하며 손을 뻗치는' 충동이다. 결론을 하루만 더 미뤄 둬라. 두 생각을 억지로 화해시키지 말고, 어느 하나를 죽이지도 말고, 그 팽팽함을 며칠 더 양손에 쥐고 버텨라. 모순이 너를 불편하게 하는 그 시간 동안, 너는 어느 한쪽만 붙들었으면 영영 못 봤을 무언가를 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