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동양·관조 전통

역(易)의 사고

역(易)의 사고는 세상을 고정된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순환하며 서로 맞바뀌는 흐름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오래된 사유 방식이다. 어떤 상태든 극에 이르면 반대로 돌아서며, 음과 양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를 낳고 갈마든다고 본다. 점치는 책에서 출발했으나 변화 그 자체를 사고의 단위로 삼는 철학으로 자라났다.

너, 한겨울 가장 추운 새벽에 서 있다고 해보자. 손끝이 곱고 입김이 얼어붙는 그 시각이 사실은 한 해에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이라는 걸, 옛사람들은 알았다. 동지(冬至). 어둠이 가장 깊어진 그 순간에 빛이 이미 돌아서고 있다는 것. 거꾸로 한여름 뙤약볕이 정수리를 태우는 하지에는, 그날부터 해가 조금씩 짧아진다. 가장 가득 찬 자리가 곧 기우는 자리다. 너는 이걸 그냥 계절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누군가는 여기서 세상 만물을 읽는 하나의 문법을 길어 올렸다.

그 문법의 이름이 역(易)이다. 한자 역은 본래 '바뀐다'는 뜻이다. 도마뱀이 빛 따라 몸 색을 바꾸는 모양에서 왔다는 설도, 해(日)와 달(月)이 합쳐진 글자라는 설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핵심은 같다. 세상에 멈춰 있는 건 없다는 것. 가장 오래된 뿌리는 까마득해서 대략 기원전 천 년 무렵, 주나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엔 거북 등딱지를 불에 구워 갈라지는 금을 보거나 시초라는 풀줄기를 헤아려 길흉을 묻던 점법이었다. 끊어진 막대(--)와 이어진 막대(—), 이 둘을 음과 양으로 삼아 여섯 개씩 쌓으면 예순넷의 괘가 나온다. 『주역』은 그 예순넷 각각에 붙은 짧고 수수께끼 같은 풀이 묶음이었다.

여기서 너는 멈칫할 거다. 점치는 책이 어떻게 사고법이 되나. 전환점은 공자 무렵,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사람들이 점괘 밑에 「십익(十翼)」이라는 열 편의 해설을 달면서다. 날개 익(翼) 자, 책에 날개를 달아 줬다는 뜻이다. 그들이 한 일은 단순했지만 결정적이었다. 길흉을 맞히는 것보다, 길흉이 왜 그렇게 도는지 그 변화의 이치를 캐물은 것이다. 이때부터 역은 미래를 엿보는 도구가 아니라 변화를 사유하는 철학이 됐다.

그 사유의 심장에 한 괘가 있다. 태(泰)괘. 하늘이 아래, 땅이 위에 놓인 모양인데, 무겁고 가라앉는 땅 기운이 위에서 내려오고 가볍고 오르는 하늘 기운이 밑에서 솟구치니 둘이 한가운데서 만나 섞인다. 그래서 태는 '크게 형통함', 막힘없이 통하는 가장 좋은 자리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괘가 비(否), 하늘이 위 땅이 아래로 제자리에 얌전히 놓인 '꽉 막힘'이다. 멀쩡하게 제자리에 있는 게 막힌 것이고, 뒤집혀 섞인 게 통하는 것이다. 더 무서운 건 태괘 맨 윗자리 풀이다. 가장 융성한 그 절정에서 옛 글은 이미 일러둔다, 성벽이 도로 해자로 무너져 내린다고. 잘 풀릴 대로 풀린 정점에 이르면 무너짐이 시작된다. 가득 차면 기운다는 그 동짓날의 이치가, 인간사 한복판에 그대로 박혀 있는 것이다. 이게 역의 핵심 통찰이다. 어떤 상태도 그 안에 이미 반대를 잉태하고 있고, 극에 다다르면 스스로 돌아선다.

이 사고를 가장 멀리 밀고 간 사람을 꼽자면 11세기 송나라의 정이(程頤)와 12세기의 주희(朱熹)다. 그들은 역을 점술에서 떼어 내, 만물이 굴러가는 보편 원리로 다시 세웠다. 주희는 역을 두고, 변화의 자리에서 마땅함을 읽어 내는 법이라 풀었다. 이 사유로 그들이 이룬 건 작지 않다. 동아시아 천 년의 세계관, 즉 고정된 본질보다 관계와 순환과 때(時)를 먼저 보는 사고의 골격이 여기서 나왔다. 의학에서 음양의 균형을, 정치에서 흥망의 주기를, 처세에서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읽는 눈이 모두 이 한 줄기다.

흥미로운 건 이 동양의 변화 논리가 서양 한복판까지 건너간 일이다. 미적분을 만든 독일의 라이프니츠는 이미 1670년대 말부터 0과 1만 쓰는 이진법을 홀로 다듬고 있었는데, 18세기 문턱인 1703년에 베이징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 부베가 보낸 편지로 『주역』의 괘 배열을 받아 본다. 끊긴 막대를 0, 이어진 막대를 1로 놓으니 예순네 괘가 정확히 이진법 수의 행렬로 읽혔다. 그가 다듬던 이진법, 바로 오늘날 모든 컴퓨터가 0과 1로 세상을 굴리는 그 체계와 음양의 짜임이 포개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그해 「이진법 산술 해설」을 내며 제목에 옛 중국 복희의 그림이 던지는 빛까지 적어 넣었고, 거기서 동서양 지혜의 공명을 봤다. 물론 역이 컴퓨터를 만든 건 아니다. 다만 음과 양 둘만으로 만물의 변화를 엮어 낸다는 그 발상이, 0과 1 둘만으로 모든 정보를 짠다는 발상과 한 핏줄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너가 어떤 일이 더없이 잘 풀려 정점에 섰다고 느끼는 순간을 만나거든, 거기서 멈춰 서 한 걸음 물러서라. 가득 찬 자리는 곧 기우는 자리다. 반대로 모든 게 꽉 막혀 캄캄한 새벽에 놓이거든, 바로 그 어둠의 바닥에서 빛이 돌아서고 있음을 기억하고 버텨라. 사태를 고정된 한 장의 사진으로 보지 말고, 이미 다음 자리로 굴러가는 한 컷의 움직임으로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