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동양·관조 전통

온고지신 (溫故知新)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것을 알아낸다는 뜻. 지나간 것을 단순히 외워 두는 일이 아니라, 충분히 데우고 곱씹어 거기서 아직 오지 않은 것에 쓸 통찰을 길어 올리는 태도를 가리킨다. '옛것'과 '새것'을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사고법이다.

너, 오래된 노트 한 권을 다시 펼친다고 해보자. 몇 해 전에 끄적여 둔 메모인데, 그때는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적었던 문장이 지금 보니 갑자기 환해진다. 그 사이에 네가 겪은 일들이 그 문장에 빛을 비춰 준 거다. 똑같은 글자인데 처음엔 죽어 있던 것이 지금은 살아서 너에게 말을 건다. 옛것이 변한 게 아니다. 네가 그것을 다시 데웠고, 데우는 순간 거기서 전에 없던 새것이 떠오른 거다.

이 일에 이름을 붙인 건 대략 2500년 전, 춘추시대 말기의 공자다. 그가 남긴 말을 제자들이 엮은 논어 위정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옛것을 데워 새것을 알면, 그것으로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 여기서 '온(溫)'이라는 글자를 잘 봐야 한다. 그냥 '기억할 기(記)'를 쓰지 않았다. 따뜻하게 데운다는 글자를 골랐다. 식은 음식을 다시 데우듯, 차게 굳은 옛 지식을 불 위에 천천히 올려 온기를 되살린다는 뜻이다. 외워서 쟁여 두라는 게 아니라, 품어서 익히고 또 익혀 제 몸의 일부로 삭이라는 거다. 공자가 살던 때는 주나라의 질서가 무너지고 제후들이 서로 잡아먹던 난세였다. 모두가 새로운 부국강병의 술수만 찾을 때, 그는 거꾸로 옛 성왕들이 세운 예와 도를 다시 데워 거기서 지금의 어지러움을 풀 길을 찾으려 했다. 복고가 곧 혁신이라는, 당시로선 묘한 역설이었다.

여기에 긴장이 하나 있다. 옛것을 데우기만 하면 그건 그냥 답습이고 복습이다. 어제 배운 걸 오늘 또 외우는 일에 무슨 스승의 자격이 붙겠나. 공자가 말한 핵심은 '지신', 새것을 안다는 그 한 발에 있다. 옛것 속에 머무는 게 아니라 옛것을 디딤돌 삼아 아직 없는 곳으로 건너가는 것. 데우는 행위와 새로 아는 행위가 하나로 이어질 때라야 비로소 온고지신이 된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반쪽이다.

이걸 가장 무섭게 보여 준 사람이 12세기 송나라의 주자, 주희다. 그가 살던 송대는 불교와 도교가 천하의 머리를 사로잡아, 천 년 전 공자의 말은 케케묵은 옛 글로 식어 가고 있었다. 주희는 그 식은 고전을 데우러 평생을 바쳤다. 흩어져 있던 논어·맹자·대학·중용을 사서로 묶고, 거기에 한 글자 한 글자 주석을 달아 다시 살려 냈다. 그런데 그가 한 일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었다. 옛 경전을 데우는 과정에서 그는 이(理)와 기(氣)라는, 공자에게는 없던 완전히 새로운 우주론을 길어 올렸다. 옛 텍스트를 충분히 데우자 그 안에서 천 년 뒤에야 보이는 새 질서가 떠오른 것이다. 이 성리학은 그 뒤 수백 년 동안 동아시아 여러 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고, 조선의 선비들이 밤새 읽은 것도 바로 주자가 데워 놓은 그 고전이었다. 옛것을 데우는 일이 한 문명의 사고 틀 전체를 새로 짠 셈이다.

그러니 너가 막힌 문제 앞에서 새로운 답을 찾아 헤맬 때, 아주 먼 데로만 달려가지 마라. 네가 예전에 풀었던 비슷한 문제, 오래된 메모, 한 번 읽고 덮은 책을 다시 꺼내 천천히 데워라. 차게 굳어 있던 그것에 지금의 네 온기가 닿는 순간, 그때는 안 보이던 새것이 거기서 떠오른다. 새것은 늘 잘 데운 옛것의 등 위에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