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논리·정합성 점검

자비의 원리 (principle of charity)

상대의 말이 어딘가 어긋나 보일 때, 일부러 가장 어리석은 해석을 골라 깨부수는 대신 그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일관된 형태로 먼저 다듬어 놓고 다루는 해석 원칙. 논리학과 언어철학에서 다듬어졌으며, 상대를 '대체로 옳고 말이 되는 존재'라고 일단 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너, 회의에서 누군가의 말을 멋지게 박살 낸 적 있을 거다. 상대가 어물거리며 한마디 던지자마자 너는 그 말의 허점을 잡아 되받아치고, 그가 입을 다물고, 좌중이 조용해진다. 이겼다. 그런데 자리에 돌아와 앉으면 묘하게 찜찜하다. 가만 보니 네가 무너뜨린 건 그가 진짜 하려던 말이 아니었다. 그의 어설픈 표현을 가장 우습게 받아들인 다음, 그 우스운 버전을 때려잡은 거다. 허수아비 하나 세워 놓고 칼질한 셈이지. 상대는 졌는데 그의 생각은 멀쩡히 살아 있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이 흔한 헛스윙을 막으려고 어떤 철학자들이 일부러 자기 손해를 보는 길을 택했던 사연이다.

먼저 장면 하나를 떠올려 보자. 네가 말도 글자도 통하지 않는 부족 사이에 떨어졌다고 치자. 토끼 한 마리가 뛰어가는데 옆에 선 원주민이 '가바가이'라고 외친다. 저 말이 무슨 뜻일까. '토끼'일까, '저녁거리'일까, '저기 봐'일까, 아니면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한 부분'이라는 괴상한 뜻일까.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후보는 무한하고, 어느 것도 못 박을 길이 없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논리학자 윌러드 콰인이 이 막막한 상황에 '근본적 번역'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찾은 출구는 뜻밖이었다. 무한한 후보 중에서 고르려면, 저 사람이 미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먼저 믿어 주는 수밖에 없다는 것. 저 사람도 나처럼 눈앞의 토끼를 보고 토끼에 관해 말하고 있을 거라는 호의적 가정 — 그게 없으면 번역 자체가 시작되지 않는다.

이 가정에 이름이 붙은 건 그보다 조금 앞이다. 전해지기로는 1950년대 말, 닐 윌슨이라는 철학자가 1959년에 쓴 글에서 '자비의 원리'라는 말을 처음 못 박았다. 자비라니, 논리를 다루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핵심을 정확히 찌른다. 상대를 자비롭게 대하라 — 그의 말을 가능한 한 참되고 앞뒤 맞는 쪽으로 읽어 주라는 뜻이다.

이 씨앗을 거목으로 키운 사람은 따로 있다. 콰인의 제자뻘인 미국 철학자 도널드 데이비드슨이다. 그는 이걸 단순한 예의나 토론 매너가 아니라,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일 자체의 바닥에 깔린 조건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논지는 이렇게 거꾸로 선다. 우리는 보통 '말이 통해야 이해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데이비드슨은 '대부분이 이미 통한다고 가정해야 비로소 이해가 시작된다'고 봤다. 상대가 믿는 것 대부분이 참이고, 그의 추론 대부분이 멀쩡하다고 깔아 두지 않으면, 그가 어쩌다 틀린 그 한 군데조차 짚어낼 수 없다. 여기서 정말 머리가 서늘해지는 대목이 나온다. 누군가와 제대로 '의견이 다르려면' 먼저 엄청나게 많은 것에 '의견이 같아야 한다'는 것. 깊은 불일치는 오히려 깊은 일치를 증거한다. 그래서 자비의 원리는 마음 약한 양보가 아니라, 의견 충돌이 성립하기 위한 논리적 전제가 된다.

이 원리가 가장 날카롭게 쓰이는 자리는 토론이다. 너도 들어 봤을 거다, '허수아비 때리기'의 반대말로 '강철 사나이 세우기'라는 말. 상대의 논증을 가장 약한 꼴이 아니라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꼴로 다시 세운 다음, 그 강철 버전과 맞붙는 방식이다. 자비의 원리의 실전 무기가 바로 이거다. 왜 손해를 자처하나 싶겠지만, 셈을 해 보면 이쪽이 남는 장사다. 약한 버전을 이겨 봐야 상대 생각은 살아남아 너를 계속 괴롭힌다. 가장 강한 버전마저 무너뜨려야 비로소 그 주장은 끝난다. 그리고 강철 버전이 끝내 안 무너지면? 축하한다, 너는 방금 공짜로 더 옳은 견해로 갈아탄 거다. 어느 쪽이든 이기는 건 자비를 베푼 쪽이다.

이 사고가 컴퓨터로 넘어간 자리도 있다. 기계에게 사람의 논쟁 글을 읽혀 '누가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으로 떠받치는가'를 뽑아내게 하는 분야가 있는데 — 흔히 논증 마이닝이라 부른다 — 여기서 줄곧 부딪히는 벽이 이거다. 사람의 말은 빈틈투성이라, 생략된 전제를 기계가 멋대로 가장 멍청하게 메우면 엉뚱한 헛소리를 잡아낸다. 그래서 '빠진 칸은 글쓴이가 합리적이라고 가정하고 가장 말 되게 채워라'라는 자비의 원리가 알고리즘의 한 규칙으로 들어앉았다. 요즘 너와 대화하는 인공지능들이 모호한 한 줄 지시에서 네 진짜 의도를 좋게 풀어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오래된 원리의 기계판이다. 사람을 이해하려고 사람이 세운 규칙이,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 기계에게 그대로 물려진 셈이다.

그러니 너가 회의에서, 협상장에서, 댓글창에서 누군가의 말을 단숨에 깨부수고 싶어지는 순간을 만나거든 — 그 충동을 잠깐 붙들고 이렇게 물어라. 내가 지금 치려는 게 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똑똑한 말인가, 아니면 내가 이기기 좋게 깎아 놓은 가장 멍청한 말인가. 상대의 주장을 그가 세운 것보다 더 튼튼하게 다시 세워 놓고, 그제야 칼을 들어라. 거기서 이기면 진짜로 이긴 거고, 거기서 지면 더 나은 생각을 얻은 거다. 자비는 베푸는 순간 늘 베푼 자에게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