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논리·정합성 점검

체스터턴의 울타리 (Chesterton's fence)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존의 규칙이나 관습, 구조물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왜 거기 있는지 먼저 이해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없애서는 안 된다는 개혁의 원칙. 20세기 영국 작가 G.K. 체스터턴이 길을 가로막은 울타리의 비유로 제시했으며, 무지를 진보로 착각하는 성급함을 경계하는 데 핵심이 있다.

너, 들판을 걷다가 길 한복판에 난데없이 울타리 하나가 가로막고 선 걸 봤다고 해보자. 누가, 언제, 왜 세웠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쓸모라곤 없어 보인다. 그저 길을 막는 흉물 같다. 네 안에서 개혁가의 피가 끓는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건 당장 치워 버려야지.' 망치를 들기 전에, 잠깐 멈춰 봐라.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멈춤에 관한 거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뚱뚱한 몸에 망토를 두르고 다니던 한 영국 작가였다.

20세기 초 영국에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이라는 글쟁이가 있었다. 추리소설 속 브라운 신부를 만들어 낸 사람이라면 너도 어렴풋이 들어 봤을지 모른다. 그는 키가 크고 몸집이 산만 했고, 길에서 자기 집 주소를 잊어버려 아내에게 전보를 칠 만큼 엉뚱한 사람이었지만, 머리만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1929년에 낸 책에 한 토막 우화를 적었다. 어떤 개혁가가 길을 가로막은 울타리를 보고 외친다. "이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으니 치워 버리자." 그러자 더 현명한 사람이 답한다. "네가 그 쓸모를 모른다면, 더더욱 치우게 둘 수 없다. 가서 그게 왜 거기 있는지부터 알아 와라. 쓸모를 알아내고 돌아와 그래도 없애겠다고 하면, 그때는 허락하마." 핵심은 잔인할 만큼 단순하다. 무언가가 거기 있는 데는 누군가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 그 이유를 모른다는 건 없앨 자격이 없다는 뜻이지, 없애도 된다는 뜻이 절대 아니라는 것.

여기서 체스터턴이 노린 진짜 과녁이 있다. 그는 자기를 '진보'라 부르는 사람들 특유의 오만을 겨눴다. 새것은 무조건 옳고 옛것은 무조건 미신이라 여기며, 이해하지 못한 것을 곧장 어리석음으로 단정해 버리는 그 성급함 말이다. 그가 보기에 그건 용감한 게 아니라 게으른 거였다. 낡은 울타리를 부수는 건 한순간이지만, 그 울타리가 어느 겨울 굶주린 소 떼가 절벽으로 쏟아지는 걸 막으려 세워졌다는 걸 알아내는 데는 품이 든다. 그 품을 들이기 싫어서 '쓸모없어 보인다'를 '쓸모없다'로 바꿔치기하는 순간, 사람은 자기 무지를 통찰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이 단순한 우화가 책장 밖으로 걸어 나와 가장 크게 쓰인 곳은 뜻밖에도 정책과 경영의 세계였다. 멀쩡해 보이지 않는 옛 법, 비효율로만 보이는 오랜 관행, 아무도 이유를 기억 못 하는 사규를 누군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단칼에 베려 할 때마다, 신중한 쪽은 이 울타리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먼저 그게 왜 생겼는지를 발굴하라고. 규칙이란 대개 어떤 사고가 터진 뒤에 그 재발을 막으려 세워진 흉터 같은 것이어서, 흉터만 보고 살을 도려내면 옛 상처가 그대로 되살아난다.

이 사고법이 가장 격렬하게 살아 숨 쉬는 현대의 현장은 따로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사람들의 세계다. 거대한 소프트웨어에는 십수 년 전 누군가 짜 넣은, 지금은 아무도 이유를 모르는 코드 한 줄이 꼭 있다. 보기엔 군더더기 같고 지워도 멀쩡히 돌아갈 것 같다. 그래서 신참이 '깔끔하게 정리한답시고' 그 줄을 지운다. 그러면 멀쩡하던 시스템이 몇 달 뒤 엉뚱한 데서 무너진다. 그 한 줄은 십 년 전 어느 새벽 서버를 통째로 마비시킨 사고를 막으려고 누군가 피땀으로 박아 둔 울타리였던 거다. 그래서 코드 다루는 이들 사이에서 '체스터턴의 울타리'는 일종의 계율이 됐다. 이유를 모르는 코드는 함부로 지우지 마라. 흥미로운 건, 이 옛 우화를 디지털 세계에 들여오자 한 가지가 더 보태졌다는 점이다. 종이 위 길가의 울타리는 누가 세웠는지 끝내 못 물어볼 수도 있지만, 잘 관리된 코드에는 모든 변경에 '누가, 언제, 왜'를 적어 남기는 이력이 따라붙는다. 울타리 옆에 세운 사람의 메모를 박아 두는 셈이다. 이유를 모를 흉물을 애초에 덜 남기려고, 작업의 상위 규율 자체가 '흔적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니 너가 회사에서든 제품에서든 '이건 왜 이렇게 해 놨지, 비효율적이네' 싶은 무언가를 만나거든, 망치부터 들지 마라. 먼저 그 울타리를 세운 사람의 자리에 서서 물어라. 이걸 세운 사람은 대체 무엇이 두려웠을까. 그 두려움의 정체를 알아내기 전까지, 너에겐 그걸 부술 자격이 없다. 쓸모를 다 이해하고도 없애겠다면, 그때 비로소 망치를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