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 탐지 (fallacy detection)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결론을 떠받치지 못하는 논증의 결함을 가려내는 사고법. 추론의 짜임새 자체가 어긋난 형식적 오류와, 형식은 멀쩡해 보여도 내용·맥락에서 사람을 속이는 비형식적 오류를 구분해 짚어 낸다. 논증의 설득력과 타당성을 분리해서 보는 눈이 핵심이다.
너,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다 진 적이 있을 거다. 분명 상대 말이 어딘가 비겁했는데, 그 자리에선 뭐가 잘못됐는지 콕 집지 못해 그냥 졌다. 집에 돌아와 이불을 차며 '아, 그때 이렇게 받아쳤어야 했는데' 하는 그 분함. 그게 바로 오늘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말이 이기는 것과 말이 옳은 것은 전혀 다른 일인데, 그 둘이 갈라지는 정확한 지점을 처음으로 지도로 그려 낸 사람이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는 '소피스트'라 불리는 직업 변론가들이 성업 중이었다. 이들은 돈을 받고 청년들에게 '논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쳤다. 핵심은 진실이 아니라 승리였다. 약한 주장을 강해 보이게 만들고, 멀쩡한 상대를 말로 옭아 망신 주는 기술. 광장에서 이들에게 걸려 넘어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이 사기술의 정체를 끝까지 파고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소피스트식 논박에 대하여'라는 짧은 책에서, 사람을 속이는 가짜 논박의 수법을 하나하나 분해해 대략 열셋으로 분류해 늘어놓았다. 말 자체의 애매함을 노린 것 여섯 가지와, 말 밖의 사정을 비튼 것 일고여덟 가지로. 인류 최초의 '반칙 목록'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가 책 말미에 남긴 말이다. 수사학에는 앞선 사람들의 업적이 쌓여 있어 거기서 출발했지만, 이 추론과 논박의 영역만큼은 자기 앞에 아무것도 없었으며 맨바닥에서 전부 스스로 세웠다고 적었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가 무엇을 해냈는지 한 가지 수법으로 끝까지 따라가 보자. 너도 분명 당해 봤을 가장 흔한 반칙, 사람을 치는 공격이다. 누가 환경 정책을 주장하는데 "당신 차도 큰 거 몰면서 무슨 환경 타령이냐"고 받아친다. 그 순간 화제는 '정책이 옳은가'에서 '저 사람이 위선자인가'로 슬쩍 바뀐다. 정책의 옳고 그름은 발언자가 위선자든 성인이든 1밀리미터도 변하지 않는데 말이다. 주장과 사람을 떼어 놓고 봐야 한다는 것 —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어 둔 이 선 하나만 머릿속에 박혀 있어도 너는 그날 이불을 차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여기서 함정이 있다. 똑같이 사람을 걸고넘어져도 그게 반칙이 아닐 때가 있다. 법정에서 증인의 과거 위증 전력을 들어 "이 사람 말은 못 믿는다"고 하는 건? 이건 정당하다. 증언의 신빙성을 따질 땐 말한 사람이 핵심 쟁점이니까. 똑같은 형태의 화살이 한쪽에선 반칙이고 한쪽에선 정당하다. 바로 이 미묘함이 이 사고법을 단순한 암기 목록이 아니라 평생 갈고닦아야 할 기술로 만든다.
그래서 오류는 두 종류로 갈린다. 추론의 뼈대 자체가 어긋난 형식적 오류 — 이건 내용을 다 지우고 골격만 봐도 틀린 게 보인다. 그리고 골격은 멀쩡한데 내용과 맥락에서 사람을 홀리는 비형식적 오류. 앞의 환경 이야기처럼, 진짜 사기는 거의 다 후자에서 일어난다. 형식 논리는 이 형식적 오류 쪽을 이천 년에 걸쳐 정교한 수학으로 키워 냈지만, 정작 우리가 매일 속는 비형식적 오류는 오랫동안 곁가지로 밀려나 있었다.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목록은 신기하게도 거의 손대지 않은 채 이천 년을 흘렀다. 교과서마다 같은 반칙들을 라틴어 이름표를 붙여 베껴 옮길 뿐이었다. 이 잠든 분야를 흔들어 깨운 사람이 1970년의 찰스 햄블린이라는 호주 철학자다. 그는 '오류들'이라는 책에서, 당대 교과서들이 답습하던 그 게으른 방식을 '표준적 취급'이라 비꼬아 부르며 통렬히 깠다. 다들 오류를 나열만 할 뿐, 대체 '오류란 무엇인가'조차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이 한 방이 학계의 자존심을 긁었고, 거기서 '비형식 논리'라는 새 분야가 터져 나왔다. 이후 더글러스 월턴 같은 학자들이 이어받아 결정적 전환을 이뤘다. 오류를 '논증의 고정된 형태'로 보길 그만두고,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의 맥락 속에서 정당한 수가 반칙으로 변질되는 순간'으로 다시 정의한 것이다. 아까 그 화살, 똑같은 인신공격이 법정에선 정당하고 토론에선 반칙이던 그 수수께끼가, 바로 이 관점에서야 풀린다.
여기서 이 이야기가 컴퓨터와 만난다. 사람들은 이 반칙 탐지를 기계에 시키려 했다. SNS에 쏟아지는 논쟁에서 오류를 자동으로 걸러 내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데 기계가 곧장 벽에 부딪혔다. 문장의 겉모양만 봐서는 도무지 반칙인지 정당한지 가릴 수가 없었던 거다. "당신은 못 믿을 사람이다"라는 똑같은 문장이 맥락에 따라 반칙도 되고 정당한 지적도 되니까. 결국 기계에게 오류 탐지를 제대로 가르치려면, 문장 하나를 들여다보는 것에서 벗어나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증명하려는 대화였는가'라는 한 단계 위의 판을 통째로 입력해 줘야 했다. 햄블린과 월턴이 사람에게 강요했던 그 관점의 전환 — 오류는 형태가 아니라 맥락에 산다는 깨달음 — 을, 기계도 똑같이 거쳐야만 했던 셈이다.
그러니 너가 누군가의 말에 묘하게 설득당하면서도 속이 께름칙한 순간을 만나거든, 두 가지를 떼어 놓고 물어라. 이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과, 이 말이 결론을 실제로 떠받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라. 지금 이 화살이 진짜 쟁점을 겨누는가, 아니면 옆에 선 사람이나 엉뚱한 곳으로 슬쩍 빗나갔는가. 그 둘 사이의 가느다란 금을 보는 눈, 그게 한 그리스인이 맨바닥에서 그어 둔 이천 년짜리 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