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사고 (narrative)
사실이나 정보를 인물, 갈등,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의 구조로 엮어 전달하고 이해하는 사고법이다. 나열된 데이터보다 서사로 묶인 정보가 더 잘 기억되고 더 강하게 설득한다는 점을 이용한다. 흩어진 사건들에 인과와 의미를 부여해 하나의 줄거리로 만든다.
너, 회의실에 숫자 마흔 개가 박힌 표 한 장을 띄워 놓고 발표를 들어 본 적 있을 거다. 매출이 몇 퍼센트, 이탈률이 몇 퍼센트. 다 맞는 숫자다. 그런데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 머릿속에 남는 건 거의 없다. 반대로, 누가 "작년에 우리 고객 한 명이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하고 한 사람의 곤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면, 너는 그걸 집에 가서 가족한테까지 옮긴다. 같은 정보인데 왜 하나는 증발하고 하나는 달라붙을까. 답은 네 머리가 표가 아니라 줄거리에 맞춰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이게 왜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박혀 있는지를 처음으로 캐물은 사람이 있다. 멀리 올라가면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시학에서 잘 짜인 이야기란 사건의 무더기가 아니라 '시작과 중간과 끝'이 인과로 묶인 하나의 행동이라고 못 박았다. 어떤 일이 그냥 다음에 일어나는 것(and then)과,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therefore)은 전혀 다르다는 거다. 그는 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뒤집힘(페리페테이아)'과 '알아차림(아나그노리시스)', 즉 상황이 거꾸로 꺾이는 순간과 인물이 진실을 깨닫는 순간이 필요하다고 봤다. 너가 좋은 영화에서 숨을 멈추는 그 대목, 2300년 전에 이미 해부돼 있었던 셈이다.
오래도록 이건 시인과 극작가의 기술로만 여겨졌다. 그러다 20세기 후반, 심리학자들이 실험실로 끌고 들어왔다. 인지심리학자 제롬 브루너는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길이 두 갈래라고 했다. 하나는 논리와 증명으로 따지는 길, 다른 하나는 이야기로 의미를 짓는 길. 그는 후자를 '내러티브 모드'라 불렀고, 사람은 자기 인생조차 줄거리로 엮어야만 납득한다고 봤다. 비슷한 시기 행동경제학의 대니얼 카너먼은 더 서늘한 걸 짚었다. 사람은 실제로 일어난 일의 총합이 아니라 '기억된 이야기'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 그래서 정보를 줄거리에 태우면 설득력이 폭발하지만, 동시에 그럴듯한 이야기에 속아 사실을 놓치기도 쉽다고 경고했다.
이 사고법을 가장 무섭게 잘 쓴 무대는 뜻밖에도 법정이다. 1980년대 미국의 법심리학자 낸시 페닝턴과 리드 헤이스티가 배심원들을 들여다봤더니, 그들은 검사와 변호사가 던진 증거 조각을 머릿속에서 제각기 하나의 '이야기'로 재조립하고 있었다. 같은 증거를 보고도 더 매끄럽고 빈틈없는 줄거리를 짠 쪽이 평결을 가져갔다. 이들은 이걸 '이야기 모형(story model)'이라 이름 붙였다. 증거의 양이 아니라 증거를 꿰는 서사의 완성도가 판결을 갈랐다는 거다. 법정만이 아니다. 처칠이 전시에 영국인을 버티게 한 것도, 한 편의 광고가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을 쓰는 너의 삶'을 팔아 통하는 것도 전부 같은 원리다.
흥미로운 건 이게 컴퓨터 시대로 와서 한 단추 위가 갈렸다는 점이다. 원래 기계에 정보를 넣는 방식은 표와 데이터베이스, 즉 사실의 격자였다. 그런데 사람을 상대로 하는 화면에선 그 격자가 자꾸 미끄러졌다. 그래서 데이터를 보여 주는 일이 '대시보드를 채우기'에서 '데이터로 이야기를 들려주기(data storytelling)'로 틀이 바뀌었다. 흩어진 숫자에 누가 왜 무엇을 겪었는지의 줄거리를 입혀야 사람이 비로소 움직였기 때문이다. 더 깊게는, 거대언어모델이 인간의 글을 학습하며 통째로 흡수한 것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서사 구조다. 기계가 사람을 설득하는 법을 익힌 통로 역시 이야기였던 거다.
그러니 너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이해시키거나 기억에 남기고 싶은 상황을 만나거든, 사실을 더 많이 쌓지 말고 그 사실들 사이에 인과의 실을 꿰어라. 누가, 무엇을 원했고, 무엇이 가로막았고, 어떻게 됐는가. 표를 줄거리로 바꾸는 그 한 번의 수고가, 잊힐 정보를 평생 남는 이야기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