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사고 (critical thinking)
주장과 그 밑에 깔린 전제, 그리고 그것을 떠받친다는 증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따져 보는 사고법.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과 실제로 근거가 탄탄한 것을 분리해서 보고, 자기 생각까지 포함해 모든 믿음에 '왜'와 '무슨 근거로'를 끝까지 묻는 태도를 말한다.
너, 누가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는 걸 듣고 속으로 '정말 그런가?' 하고 한 번 멈칫해 본 적 있을 거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데 너만 어쩐지 걸리는 게 있다. 그 한순간의 멈칫함, 떠밀려 끄덕이기 직전에 발을 거는 그 작은 저항.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인류가 이 멈칫함을 하나의 기술로 벼려 내는 데 이천 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그 기술을 맨 처음, 가장 지독하게 휘두른 사람은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광장에 맨발의 사내가 어슬렁거렸다. 소크라테스다. 그는 글 한 줄 남기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묻기만 했다. 누가 '나는 정의가 뭔지 안다'고 하면, 그는 정중하게 다가가 묻기 시작한다. 정의가 뭡니까. 빚을 갚고 받은 것을 돌려주는 겁니다. 그래요? 그럼 친구가 제정신일 때 칼을 맡겼다가 미쳐서 돌려 달라고 하면, 그 칼을 돌려주는 게 정의입니까? 상대가 멈칫한다. 아니, 그건 아니죠. 그럼 방금 그 정의는 틀린 거군요. 이런 식으로 그는 상대가 안다고 철석같이 믿던 것을 한 꺼풀씩 벗겨, 결국 '나는 사실 모른다'는 맨바닥에 데려다 놓는다. 이 끈질긴 되묻기를 후대 사람들은 엘렌코스, 곧 논박이라 불렀다. 핵심은 새 지식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가짜로 안다고 착각하던 것을 무너뜨려 진짜 무지를 자각시키는 데 있었다.
여기서 이 이야기의 긴장이 선다. 이 되묻기는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 끔찍하게 불편한 물건이다. 광장에서 한가락 한다는 정치인과 시인과 장인을 붙들고 '당신은 사실 당신 일의 근거를 모른다'를 한 명씩 증명해 보였으니, 망신당한 사람이 도시에 가득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게으른 말에 들러붙어 따끔하게 쏘는 등에에 비유했다. 도시를 깨어 있게 하려고 일부러 쏘아 대는 성가신 벌레. 그런데 등에는 결국 손바닥에 짓이겨지는 법이다. 기원전 399년, 아테네는 그를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세웠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를 죽인 진짜 죄목은, 모두가 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을 자꾸 모른다고 들춰낸 일이었다. 그가 법정에서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이 캐묻는 삶의 전부를 압축한다 — 캐묻지 않는 삶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없다.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그는 그 멈칫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이건 철학자의 별난 재주로만 남아 있었다. 이 태도가 '비판적 사고'라는 또렷한 이름표를 달고 누구나 배워야 할 능력으로 올라선 건 뜻밖에 한참 뒤, 20세기 초 미국의 교실에서였다. 1910년 철학자 존 듀이가 교사들을 위해 쓴 책에서 이걸 정면으로 다뤘는데, 그는 이 사고를 주로 '반성적 사고'라 부르며 이렇게 못 박았다. 어떤 믿음이든, 그것을 떠받치는 근거와 그것이 끌고 갈 결론에 비추어 능동적이고 끈질기고 주의 깊게 따져 보는 일. 소크라테스가 광장에서 몸으로 하던 그 되묻기를, 듀이는 한 문장의 정의로 박제해 학교 안으로 들여놓은 셈이다. 이때부터 비판적 사고는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가르치고 훈련할 수 있는 기술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거기서 더 나아간 대목이 흥미롭다. 가르칠 수 있다면 잴 수도 있어야 한다. 1930년대 후반, 굿윈 왓슨과 에드워드 글레이저라는 두 사람이 비판적 사고를 점수로 측정하는 검사를 만들었다. 짧은 글을 읽히고, 거기서 어떤 결론을 안전하게 끌어낼 수 있는지, 글쓴이가 무엇을 슬그머니 전제로 깔았는지, 어떤 추론이 정당하고 어떤 게 비약인지를 가려내게 했다. 보이지 않던 머릿속 태도를 숫자로 바꿔 놓은 이 시도는 지금도 기업과 학교의 채용·선발에 쓰인다. 그 뒤로 로버트 에니스, 리처드 폴, 린다 엘더 같은 이들이 이어받아, 비판적 사고를 단순한 기술 묶음이 아니라 지적 겸손과 지적 정직 같은 사람의 됨됨이로까지 끌어올렸다. 잘 따지는 사람이 되려면 남의 허점만 쑤시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근거 없음부터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너는 한 가지를 놓치면 안 된다. 비판적 사고에서 칼끝이 가장 먼저 향해야 할 곳은 남이 아니라 너 자신이다. 소크라테스의 되묻기가 위대했던 건 상대를 이겨서가 아니라, 그가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 '나는 모른다'를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무엇이든 자신만만하게 술술 답해 주는 기계와 화면 앞에 사는 시대일수록 이건 더 절실해진다. 매끄럽고 그럴듯하게 들리는 답일수록, 그 밑에 깔린 전제가 무엇이고 그걸 떠받친다는 근거가 진짜인지 발을 한 번 거는 사람. 그 멈칫함이 너를 떠밀려 끄덕이는 무리에서 빼낸다.
그러니 너가 누군가의 자신만만한 단언 앞에 섰을 때, 혹은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끄덕이는 자리에 끼었을 때, 그 한순간 발을 걸어라. 이 주장은 무엇을 당연한 전제로 깔고 있는가, 그것을 떠받친다는 증거는 정말 그걸 떠받치는가, 그리고 가장 어려운 마지막 물음 — 지금 이렇게 묻는 나 자신은 무슨 근거로 이걸 믿고 있는가. 맨발의 사내가 광장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목숨과 바꾼 게 바로 그 멈칫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