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실무 분야에서 온 절차

사례추론 / 판례 (case-based reasoning)

과거의 비슷한 사례에서 내려진 판단을 끌어와, 그 차이만큼 손질해서 지금 눈앞의 문제에 적용하는 사고법이다. 규칙을 먼저 세우고 사실을 끼워 맞추는 대신, 닮은 선례를 먼저 찾고 거기서 추론을 시작한다. 법조계의 판례 운용이 가장 익숙한 모습이지만, 의사의 진단과 정비공의 수리에도 똑같이 살아 있다.

너, 처음 자전거를 고치겠다고 덤벼 본 적 있나. 체인이 빠졌는데 설명서도 없고 머릿속에 자전거 역학 같은 건 한 줄도 없다. 그런데 손은 움직인다. 작년에 친구 자전거에서 비슷하게 빠진 걸 본 기억, 그때 체인을 어떻게 톱니에 다시 걸었는지, 그 한 장면을 떠올리고는 그대로 따라 한다. 너는 원리를 연역한 게 아니다. 닮은 과거 하나를 끄집어내 지금에 갖다 붙인 거다. 인간이 새 문제를 만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이거다. 규칙책을 펴는 게 아니라 비슷했던 옛날을 더듬는 것.

이 더듬기를 가장 오래, 가장 정교하게 제도로 만든 동네가 법이다. 흔히 영미법을 떠올리지만 뿌리는 더 깊다. 로마법에도 이미 비슷한 사안엔 비슷하게 판단한다는 감각이 있었고, 중세 잉글랜드에서 떠돌이 왕실 재판관들이 지방마다 들쭉날쭉하던 관습을 모아 하나의 공통된 법, 곧 보통법(common law)으로 엮으면서 선례구속이라는 뼈대가 굳어 갔다. 라틴어로 stare decisis, 결정된 것에 머물러라. 앞서 비슷한 사건에서 법원이 이렇게 판단했으면, 뒤의 법원도 함부로 뒤집지 말고 그 판단에 서라는 원칙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 전통에서 법대생들이 처음 배우는 건 조문 암기가 아니라 판례 읽는 법이다. 사실관계가 어디까지 같고 어디서부터 다른가를 가르는 일.

여기서 진짜 묘미가 나온다. 어떤 사건도 앞선 사건과 완전히 똑같지 않다. 그래서 법률가는 두 가지 칼을 쓴다. 지금 사건이 선례와 본질적으로 닮았으니 같은 결론을 따르자고 끌어당기거나, 아니다 결정적인 데서 다르다며 선례를 떼어 내거나. 이 떼어 내기를 구별짓기(distinguishing)라 부른다. 1928년 스코틀랜드의 한 카페, 한 여자가 친구가 사 준 진저비어를 마시다 병 안에 썩은 달팽이가 들어 있는 걸 보고 앓아눕는다. 4년 뒤 1932년 최고심까지 올라가 결판이 난 도널휴 대 스티븐슨 사건이다. 그 전까지는 계약을 맺은 당사자끼리만 책임을 물을 수 있었으니, 술값을 낸 건 친구였던 그녀는 제조사에 따질 길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법원은 닮은 선례들을 새로 엮어, 제조자는 자기 물건을 쓸 사람 누구에게나 합리적 주의를 다할 의무가 있다는 판단을 세운다. 한 병의 달팽이가 현대 과실책임의 모태가 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사고가 이 한 사례를 닮은꼴로 끌어다 판단되었다. 사례추론이 어떻게 거듭 자라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법 바깥에서도 같은 머리를 쓴다. 의사는 교과서 정의보다 먼저 전에 본 환자를 떠올려 이 사람도 그런가 가늠하고, 베테랑 정비공은 이 소음 작년 그 차랑 똑같네 하며 손을 댄다. 1980년대 들어 컴퓨터과학자들이 이 인간의 버릇 자체를 기계에 옮기겠다고 나섰다. 로저 섕크가 기억이 곧 추론이라고 밀어붙였고, 그의 제자 재닛 콜로드너가 사례기반추론(case-based reasoning)이라는 이름으로 한 분야를 세웠다. 규칙을 일일이 입력하는 대신 풀어 본 사례들을 통째로 저장해 두고, 새 문제가 오면 가장 닮은 옛 사례를 검색해 그 해법을 가져다 차이만큼 손질하고 결과를 다시 사례로 쌓는 순환. 흥미로운 건 이 발상이 머릿속 윗단추를 갈아 끼웠다는 점이다. 지능은 일반 법칙을 쥐는 데 있다는 오랜 믿음에서, 지능은 적절한 기억을 적절한 순간에 떠올리는 데 있다는 쪽으로. 헬프데스크 진단 시스템부터 오늘날 비슷한 판례와 의무기록을 끌어와 답을 만드는 검색증강 인공지능까지, 그 핏줄이 이어진다.

그러니 너가 처음 보는 문제 앞에서 막막하거든, 원리부터 세우려 헛심 쓰지 말고 먼저 물어라. 내가 전에 겪은 것 중, 남이 풀어 둔 것 중 이것과 가장 닮은 한 건이 무엇인가. 그걸 끌어와 같은 점은 따르고 다른 점은 도려내라. 추론은 거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