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증책임 사고 (burden of proof)
어떤 주장이 참으로 받아들여지려면 그 주장을 내세운 쪽이 증거를 대야 한다는 원칙. 누가 무엇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입증해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 두는 사고법이다. 입증하지 못하면 주장은 기각되며, 침묵이나 증거 없음은 그 자체로 반대편의 손을 들어 준다.
너, 친구 둘이 말다툼하는 걸 옆에서 지켜본다고 해 보자. 한 명이 "저 가게 사장이 거스름돈을 떼먹었어"라고 한다. 다른 한 명이 "아니야"라고 받는다. 자, 이제 누가 무엇을 보여 줘야 이 다툼이 끝나는가. 떼먹었다는 쪽이 영수증이든 목격이든 뭔가를 내놓아야 하나, 아니면 안 떼먹었다는 쪽이 결백을 증명해야 하나. 너는 아마 직감으로 안다. 떼먹었다고 말을 꺼낸 사람이 대 봐야 한다고. 못 대면 그 말은 그냥 흩어진다. 이 직감, 누가 짐을 져야 하는가에 대한 이 감각이 오늘 이야기의 전부다. 그런데 이게 직감으로만 굴러가면 힘센 사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걸 규칙으로 못 박아야 했다.
그 못을 처음 박은 건 법정이었다. 로마법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 줄짜리 원칙이 있다. 에이 인쿰비트 프로바티오 퀴 디키트, 논 퀴 네가트. 입증은 부정하는 자가 아니라 주장하는 자에게 있다. 말을 꺼낸 쪽이 증거를 댄다는 이 문장이 2천 년을 굴러 내려와 지금 모든 재판의 바닥에 깔려 있다. 왜 이렇게 정했을까. 없음을 증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날 거기 없었다"를 완벽히 증명하려면 우주의 모든 좌표에서 네가 부재했음을 보여야 한다. 반면 "네가 거기 있었다"는 사진 한 장이면 된다. 그래서 짐은 있음을 말하는 쪽, 변화를 주장하는 쪽이 진다. 형사재판에선 이게 더 무거워진다. 검사는 그냥 그럴듯하게가 아니라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까지 끌고 가야 한다. 피고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 무죄추정이란 결국 입증의 짐을 통째로 검사 어깨에 얹어 두고 시작한다는 뜻이다. 짐을 못 들면, 진실이 무엇이든 무죄다.
여기서 긴장 하나가 솟는다. 그럼 입증 못 한 주장은 거짓인가. 아니다. 입증 안 됐을 뿐이다. 이 둘을 헷갈리면 함정에 빠진다. 옛날 마녀재판이 그 함정의 끝판이었다. 너의 결백을 네가 증명하라고 짐을 거꾸로 얹은 순간, 물에 빠뜨려 떠오르면 마녀, 가라앉아 죽으면 무죄가 됐다. 짐을 누구에게 지우느냐가 삶과 죽음을 갈랐다. 그래서 이 사고법의 핵심은 답을 찾기 전에 누가 짐을 지는지부터 정하는 데 있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이걸 한 칼에 벼려 놨다. 비범한 주장에는 비범한 증거가 필요하다. 동네 가게 거스름돈 얘기엔 영수증 한 장이면 족하지만, 외계인이 다녀갔다는 주장엔 그만큼 무거운 증거가 따라붙어야 한다. 짐의 크기가 주장의 크기를 따라가는 것이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 점을 찻주전자 하나로 찔렀다. 지구와 화성 사이를 너무 작아 망원경에도 안 잡히는 도자기 찻주전자가 돌고 있다고 내가 우긴다면, 네가 그게 없음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 말을 믿어야 하는가. 아니다. 짐은 우긴 나에게 있다. 못 대면 기각이다. 증명 못 한다고 참이 되는 게 아니다.
이 사고법은 법정 밖으로 번졌다. 과학이 통째로 이걸 빌려 갔다. 새 약이 효과 있다고 주장하는 쪽이 임상시험으로 입증해야지, 반대편이 효과 없음을 증명할 의무는 없다. 토론과 협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가 현상 변경을 요구하는가, 그쪽이 짐을 진다. 디지털 세계로도 그대로 옮겨 갔다. 법정에서 한쪽이 증거를 숨기거나 없앴을 때 그 침묵을 불리하게 해석하는 규칙이, 데이터가 폭증한 시대엔 이메일과 로그를 보존할 의무로 굳었다. 누가 무엇을 남겼어야 하는가, 그 짐을 못 지면 법정은 사라진 증거를 그 사람에게 불리하게 읽는다.
그러니 네가 누군가의 단정적인 한마디 앞에 멈칫하거든, 그 말을 반박할 거리를 급히 찾지 마라. 먼저 물어라. 이 주장의 짐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그 짐을 들고 있는가. 짐을 안 든 주장은, 네가 무너뜨릴 필요조차 없이 이미 서 있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