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과학·경험적 방법

패러다임 사고 (paradigm)

한 시대의 학문 공동체가 당연한 것으로 공유하는 지배적 틀, 곧 무엇을 묻고 무엇을 답으로 인정할지를 미리 정해 주는 사고의 바탕을 가리키는 말. 이 틀 안에서 평소의 탐구가 굴러가다가, 틀로는 설명 안 되는 변칙이 쌓이면 위기를 거쳐 통째로 다른 틀로 갈아엎어진다고 본다. 현상을 묶어 주는 그 틀의 존재와 한계를 동시에 의식하는 것이 핵심이다.

너, 분명히 눈앞에 있는데도 끝내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믿겠나. 1774년 여름, 영국의 한 목사이자 화학자가 빨갛게 달군 수은 덩어리에 햇빛을 모아 비추다가 이상한 기체 하나를 받아 냈다. 그 안에 촛불을 넣으니 평소보다 훨씬 맹렬하게 타올랐고, 쥐를 넣으니 더 오래 팔딱거렸다. 조지프 프리스틀리라는 이 사람은 인류 최초로 순수한 산소를 손에 쥔 거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무엇을 쥐었는지 죽을 때까지 몰랐다. 그가 본 것은 산소가 아니라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 공기'였다. 같은 병 속 같은 기체를 보고도 말이다.

당시 화학자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생각이 있었다. 무엇이 탄다는 건 그 속의 '플로지스톤'이라는 불의 원소가 빠져나가는 것이라는 믿음. 잘 타오르는 기체란 곧 플로지스톤을 잘 빨아들이는, 그래서 미리 비워져 있는 공기일 수밖에 없었다. 프리스틀리에게 그 틀은 안경이 아니라 눈동자 그 자체였다. 그는 그 틀을 통해 보는 게 아니라 그 틀로 보았기에, 새 기체의 정체를 정반대로 읽어 낸 것이다. 바로 여기서 너는 무서운 한 가지를 배워야 한다. 사람은 사실을 날것 그대로 보지 않는다. 늘 어떤 틀에 얹어 본다. 그 틀이 잘 맞을 땐 세상이 또렷하지만, 틀 자체가 어긋난 자리에선 코앞의 진실도 엉뚱하게 번역되어 들어온다.

그 똑같은 기체를 건네받아 전혀 다르게 읽은 사람이 프랑스의 라부아지에다. 그는 프리스틀리가 파리에 들러 직접 실험을 보여 주자, 플로지스톤이라는 유령을 아예 지워 버리고 정반대로 뒤집었다. 탄다는 건 무언가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이 새 기체가 물질에 달라붙는 것이다. 그는 그것에 산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같은 불꽃, 같은 실험, 그러나 완전히 다른 세계. 한쪽에선 무언가 새어 나가고, 다른 쪽에선 무언가 들러붙는다. 둘은 같은 말로 대화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프리스틀리는 산소를 발견하고도 평생 플로지스톤을 변호하다 1804년에 눈을 감았고, 라부아지에의 새 틀이 화학 전체를 갈아엎었다.

이 갈아엎힘의 정체를 한 단어로 붙잡아 준 사람이 20세기의 토머스 쿤이다. 그는 본래 물리학을 공부하다 과학사로 건너간 사람인데, 옛 과학을 읽을수록 한 가지가 또렷해졌다. 과학은 사람들이 흔히 믿듯 사실이 차곡차곡 쌓여 매끄럽게 자라는 게 아니라는 것. 평소엔 한 시대가 공유하는 거대한 틀 안에서 자잘한 수수께끼만 푸는 얌전한 작업이 이어지다가, 그 틀로는 도무지 안 풀리는 변칙이 자꾸 불거지면 학문 전체가 위기에 빠지고, 끝내 낡은 틀이 송두리째 새 틀로 교체된다는 것이다. 그는 1962년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얇은 책에서 이 지배적 틀에 이름을 붙였다. 패러다임. 그리고 틀이 바뀌는 그 순간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불렀다. 그가 짚은 가장 섬뜩한 대목은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가 그랬듯, 옛 틀과 새 틀에 선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봐도 같은 것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걸 두 틀이 '공통의 잣대가 없다'는 뜻으로 통약불가능이라 했다.

쿤이 맨 처음 떠올린 건 아니다. 앞서 1930년대에 폴란드의 루드비크 플레크라는 사람이 과학자 집단이 공유하는 '사유 양식'이 사실 인식 자체를 빚어낸다는, 놀랍도록 비슷한 생각을 품은 적이 있었고 쿤도 그 빚을 인정했다. 다만 그것을 한 시대의 공용어로 못 박은 건 쿤의 1962년 책이었다. 이 책은 과학사의 울타리를 훌쩍 넘었다. 사회학자도 경제학자도 자기 분야의 패러다임을 말하기 시작했고, '패러다임 전환'은 학계를 벗어나 회사 회의실의 입버릇이 되었다. 컴퓨터를 짜는 사람들조차 일하는 방식의 큰 틀을 두고 프로그래밍 패러다임이라 부른다. 한 화학 논쟁에서 나온 말이, 생각의 틀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만능 단어가 된 셈이다. 쿤이 남긴 진짜 폭탄은 따로 있다. 우리가 객관적이라 믿는 '데이터'마저도 어떤 틀에 얹혀야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는 것 — 날것의 순수한 관찰 같은 건 없다는 깨달음이다.

그러니 너가 어떤 문제 앞에서 아무리 애써도 답이 안 나오고, 들이미는 사실마다 자꾸 엉뚱하게 풀린다고 느껴지거든, 그 사실들을 더 노려보기 전에 한 발 물러서서 물어라. 나는 지금 이걸 어떤 틀에 얹어 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틀을 내가 고른 적이 있기는 한가. 프리스틀리처럼 코앞의 산소를 쥐고도 플로지스톤만 변호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답이 안 보일 땐 답을 더 파지 말고, 네가 그 답을 끼워 넣고 있는 틀을 의심하라. 진짜 도약은 새 사실이 아니라 새 틀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