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과학·경험적 방법

자연실험 (natural experiment)

연구자가 실험실에서 조건을 인위적으로 나누는 대신,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 준 대조 상황을 골라내 원인과 결과를 따져 보는 방법. 정책이나 사건, 지리적 경계 같은 것이 사람들을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갈라놓았을 때, 마치 누군가 일부러 실험군과 대조군을 나눠 둔 것처럼 그 차이를 읽어 내는 것이 핵심이다.

너, 어떤 약이 진짜 효과가 있는지 알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대충 알 거다. 사람을 둘로 갈라 한쪽엔 약을, 한쪽엔 가짜 약을 주고 결과를 비교한다. 깨끗하다. 그런데 세상엔 그렇게 갈라 볼 수 없는 물음이 훨씬 많다. 최저임금을 올리면 일자리가 줄까? 그러면 한 나라를 둘로 쪼개 한쪽만 임금을 올려 보겠다고? 그럴 권한도, 그래도 되는 윤리도 없다. 깨끗한 비교가 불가능해 보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손을 놓고, 누군가는 묘한 데 눈을 돌린다. 세상이 어쩌다 저 혼자 둘로 갈라 놓은 자리는 없는가. 오늘 이야기는, 실험을 할 수 없는 곳에서 실험을 훔쳐 오는 법에 관한 거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1854년 런던의 콜레라다. 그 시절 사람들은 콜레라가 나쁜 공기, 악취를 타고 번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존 스노라는 의사는 물을 의심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증명하느냐였다. 사람들을 붙들고 한쪽엔 깨끗한 물, 한쪽엔 더러운 물을 먹여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바로 그때 스노는 런던이 이미 그 실험을 저질러 놓았다는 걸 알아챈다. 같은 동네, 심지어 옆집끼리도 수도 회사가 둘로 갈려 있었다. 한 회사는 상수원 취수구를 하수에 오염된 템스강 하류에 그대로 두고 있었고, 다른 한 회사는 마침 몇 해 전 취수구를 상류 깨끗한 자리로 옮겨 둔 참이었다. 집집마다 어느 회사 물을 먹는지는 대개 오래전 누군가 정해 둔 것이라, 정작 사는 사람의 빈부나 습관과는 상관이 없었다. 누가 일부러 짜 맞춘 듯이, 똑같은 사람들이 물 하나만 다르게 나뉘어 있던 것이다. 스노는 회사별로 죽은 사람을 세었다. 오염된 물을 먹은 집에서는 만 호당 삼백 명 넘게 죽었고, 깨끗한 물을 먹은 집에서는 마흔 명이 채 안 죽었다. 그는 이걸 직접 '거대한 실험'이라 불렀다. 자기가 설계한 실험이 아니라, 도시가 모르고 차려 놓은 실험의 밥상을 발견해 읽어 낸 것이다.

여기서 너가 붙잡아야 할 핵심이 있다. 실험의 진짜 힘은 흰 가운이나 실험실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비교되는 두 집단이 처음부터 엇비슷했고, 딱 하나의 조건만 우연히 달랐다'는 그 사실 하나에서 나온다. 그 조건만 충족되면, 나누는 손이 연구자의 손이든 우연의 손이든 상관없다. 스노가 한 일은 바로 그 '우연의 손'을 알아본 거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스노의 시대엔 이게 하나의 천재적 발상이었을 뿐 정식 방법론으로 서지는 못했다. 이름조차 없었다. 한동안 자연실험은 영리한 사람이 어쩌다 운 좋게 써먹는 잔재주처럼 학문의 변두리에 머물렀다.

이 잔재주를 학문의 왕도로 끌어올린 건 뜻밖에도 20세기 후반의 경제학자들이다. 1990년대 초, 데이비드 카드와 앨런 크루거라는 두 사람이 바로 그 답 없어 보이던 최저임금 문제에 달려들었다. 그들이 찾은 우연의 손이 절묘하다. 1992년, 미국 뉴저지주가 최저임금을 시간당 4.25달러에서 5.05달러로 올리기로 했는데, 강 하나 건넌 옆 동네 펜실베이니아는 그대로였다. 강 양쪽의 패스트푸드 가게들은 손님도, 경기도, 사는 형편도 거의 똑같았다. 다른 건 임금 법뿐. 두 사람은 임금 인상 전후로 사백 곳 넘는 햄버거 가게의 고용을 일일이 조사했다. 결과는 당시 경제학 교과서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임금을 올린 뉴저지에서 일자리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줄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발칵 뒤집혔고 격렬한 논쟁이 붙었지만, 더 중요한 건 방법 그 자체였다. 칠판 위 이론으로 싸우던 학문에, 세상이 차려 놓은 실험을 찾아내 증거로 들이미는 길이 열린 거다.

가장 잘 쓴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카드다. 그는 최저임금 한 건으로 그치지 않았다. 1980년 쿠바가 갑자기 빗장을 풀어 십만 명이 넘는 난민이 한꺼번에 마이애미로 쏟아진 사건을 두고도, 그 누구도 설계할 수 없던 이 인구 충격을 자연실험으로 읽어 냈다. 이민이 밀려들면 원주민 임금이 깎인다는 통념과 달리, 마이애미 저학력 노동자의 형편이 별로 나빠지지 않았음을 보였다. 그리고 카드의 동료 조슈아 앵그리스트와 휘도 임번스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우연한 실험에서 대체 어디까지를 '원인과 결과'라고 말해도 되는지 그 경계를 수학적으로 또렷이 그어 냈다. 우연이 나눠 준 비교를 함부로 믿지 않으면서도 쓸 만큼은 쓰는 법, 그 규칙을 세운 것이다. 2021년, 스웨덴 한림원은 이 세 사람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안겼다. 스노가 콜레라 지도 위에서 더듬거리며 발견한 발상이, 거의 백칠십 년 만에 학문의 정점에서 정식 이름과 자격을 얻은 순간이었다.

이게 디지털로 넘어간 자리는 조금 결이 다르다. 자연실험 본연의 정신은 컴퓨터에 직접 옮겨 심을 만한 게 아니다. 핵심이 계산이 아니라 '세상이 우연히 갈라놓은 자리를 알아보는 안목'이기 때문이다. 다만 카드와 동료들이 퍼뜨린 그 사고방식 — 이론으로 우기지 말고 세상이 만든 대조를 데이터로 읽어라 — 은 오늘날 거대 기술기업들의 일하는 방식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새 버튼 하나를 두고 이용자를 무작위로 둘로 갈라 한쪽에만 보여 주고 반응을 비교하는 그 흔한 A/B 테스트가 실은 같은 핏줄이다. 나아가, 그렇게 일부러 가르는 것조차 불가능할 때 — 이미 벌어진 정책 변경이나 기능 출시의 흔적을 데이터에서 더듬어 인과를 캐내는 '준실험' 분석은, 스노가 수도 회사 명부를 뒤지던 바로 그 동작을 데이터센터 규모로 되풀이하는 일이다. 도구가 바뀌었을 뿐, 우연의 손을 찾아 읽는다는 자세는 그대로다.

그러니 너가 어떤 물음 앞에서 '이건 실험을 해 볼 수가 없으니 답을 모른다'며 손을 놓고 싶어지거든, 한 걸음 멈춰 다르게 물어라. 세상이 이미 이걸 어딘가에서 갈라 놓지는 않았는가. 법이 바뀐 경계, 강 하나를 사이에 둔 두 동네, 우연한 사고나 추첨이 비슷한 사람들을 두 갈래로 나눠 놓은 자리. 그런 틈을 찾아내는 눈이 있다면, 너는 실험실 없이도 실험을 손에 넣는다. 진짜 증거는 만드는 게 아니라, 세상이 흘려 둔 걸 알아보는 데서 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