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며 배우기 (learning by teaching)
어떤 주제를 남에게 설명할 것을 전제로 정리하면서 자기 이해의 빈틈을 발견하고 메우는 학습법이다. 듣는 것보다 가르치는 것이 기억과 이해에 더 깊게 남는다는 경험에 바탕을 둔다. '가르치기 위해 배운다'는 역설을 학습 전략으로 뒤집은 것이다.
너, 시험 전날 친구한테 한 단원을 설명해 준 적이 있을 거다. 분명히 책을 다 읽었고 머릿속으로는 안다고 믿었는데, 막상 입을 열어 친구 앞에서 풀어 말하기 시작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어떤 대목에서 말이 턱 막힌다. "그러니까 이게… 어, 잠깐." 네가 안다고 착각했던 바로 그 자리에 구멍이 뚫려 있던 거다. 친구는 모르고 지나갔을 그 구멍을, 너는 가르치려 입을 떼는 순간 들켰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날 더듬거리며 메운 그 한 군데가 시험장에서는 제일 또렷하게 떠오른다. 혼자 열 번 읽은 페이지보다, 남에게 한 번 설명하다 막혔던 자리가 더 오래 남는 거다.
이 현상에 사람들이 정색하고 이름을 붙이고 학교 체계로 끌어들인 건 18세기 영국에서다. 인도 마드라스에서 군인 자제들을 가르치던 목사 앤드루 벨이, 교사가 턱없이 모자란 형편에서 묘수를 하나 썼다. 좀 더 아는 아이에게 덜 아는 아이를 가르치게 시킨 거다. 비슷한 시기 런던의 가난한 동네에서 조지프 랭커스터도 같은 방식을 독립적으로 굴렸다. 한 교실에 수백 명을 몰아넣고, 잘하는 학생이 모니터가 되어 한 무리씩 떠맡아 가르쳤다. 이 모니터식 학교는 19세기 초 영국과 미국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가난해서 짜낸 고육책이었지만, 사람들은 곧 묘한 사실을 알아챘다. 배운 아이보다 가르친 아이가 더 많이 남기더라는 것. 가르치는 자리에 선 모니터들의 실력이 유독 빨리 자랐다.
왜 그런지를 한참 뒤에야 사람들이 따져 봤다. 듣기만 할 때 네 머리는 흐름을 대충 따라가며 "응, 그렇지" 하고 끄덕이는 것으로 끝낸다. 이해한 듯한 매끈한 느낌, 이걸 인지심리학자들은 유창성의 착각이라 부른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설명하려면 사정이 달라진다. 흩어진 조각을 순서대로 세우고, 이게 왜 저것으로 이어지는지 까닭을 채우고, 상대가 "왜요?" 하고 물어올 빈틈을 미리 막아야 한다. 그 정리의 압박이 네가 모르는 자리를 가차 없이 비춘다. 20세기 후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이걸 거의 의식처럼 다듬어 썼다. 어떤 개념을 진짜 아는지 확인하려면, 그 분야를 처음 듣는 사람에게 쉬운 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 보라고. 막히는 데가 나오면 거기가 네가 모르는 자리니, 책으로 돌아가 그 한 군데만 메우고 다시 설명하라고. 전문용어 뒤에 숨지 못하게 일부러 쉬운 말로 풀게 한 게 핵심이다. 어려운 단어는 모름을 가려 주지만, 쉬운 말은 모름을 발가벗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간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연구자들이 2000년대 들어, 가르칠 상대가 꼭 진짜 사람일 필요가 있나 물었다. 그래서 만든 게 '가르칠 수 있는 행위자'라는 학습 프로그램이다. 화면 속에 어리숙한 가상 학생을 하나 앉혀 두고, 진짜 학생이 그 가상 학생을 가르치게 한다. 가상 학생은 배운 대로 문제를 풀다 틀리고,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가르치던 학생은 제 설명의 허점을 스스로 깨닫고 고쳐 나간다. 남을 가르친다는 책임감이 자기 공부를 끌어올리는 이 효과를, 연구자들은 제자 효과라 불렀다. 그리고 요즘 너와 대화하는 인공지능에게도 같은 수가 쓰인다. 큰 모델이 풀이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하게 만들고, 그 설명을 작은 모델에게 가르쳐 따라 하게 한다. 사람이 수백 년 전 교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치가, 기계를 길들이는 방법으로 옮겨 간 셈이다.
그러니 네가 무언가를 정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데 다 안다는 느낌만 맴돌고 손에 안 잡히거든, 그 느낌을 믿지 마라. 옆 사람을, 없으면 빈 의자를 하나 앉혀 두고, 그것도 안 되면 너 자신을 학생 삼아,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쉬운 말로 처음부터 소리 내어 설명해 봐라. 말이 막히는 바로 그 자리, 거기가 네가 채워야 할 진짜 공부다.